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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향 (殘香) - Leaing Isle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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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매혹시키는 잔인한 향기 '잔향 (殘香)'
건반과 기타 그리고 보컬을 맡은 이순용을 비롯, 베이스의 오세웅, 드럼의 김성헌, 기타의 박각노. 이들 네 명의 라인업을 갖춘 4인조 모던 락 밴드 잔향이 드디어 그들의 첫 정규EP 앨범을 발매한다. 향(부제: back to lo-fi), 섬(isle), 선(keep silent), 노을(sunset street), 념(forget me not)의 총 5곡이 수록된 이 앨범에는 다수의 밴드경력을 지닌 멤버 개개인의 역량이 십분 발휘되어 녹록치 않은 실력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몽환적이고 중독성 강한 곡 구성과 영국적 감성의 사운드는 이전 한국 락 씬 에서는 볼 수 없는 신선함을 던져준다. 절규하는 듯한 보컬과 어우러진 은유적인 가사에는 다듬어지지 않은 그들의 거친 감성이 녹아있다. 침잠하는 에너지를 빈틈없는 사운드와 쓸쓸한 서정성으로 표현하는 잔향. 이번 EP 앨범은 앞으로 그들의 성공적인 활동을 가늠해 보는데 충분한 기준이 될 것이다.
앨범의 타이틀은 '섬'으로서, 2번 트랙에 수록된 전체 타이틀 곡 '섬(isle)'과 일치한다. 밴드의 핵심으로서 건반과 기타, 보컬을 맡으며, 거의 모든 곡들의 기본 모티브와 작사를 책임지는 이순용이 김기덕 감독의 '섬'이란 영화를 보고 영감을 받아 썼다는 이 곡은, '고립'이라는 이름을 가진 두 개의 섬이 '소통'으로 이르러가는 평온을 얘기하고 있다. 귀에 쉽게 들어오는 멜로디와 다소 흥겨운 리듬이 대중성과 작품성 두 가지 모두 만족시키는 베스트 넘버가 될 듯 하다.
1번 트랙의 '향(back to lo-fi)'은 beatles의 get back 을 시험 삼아 이런저런 편곡을 시도해보다가 그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색다른 멜로디와 구성이 나와 일단 건반과 보이스로 초안을 잡은 후 멤버들과의 합주를 통해 완성시켰다고 한다. 향처럼 스며드는 로파이 성향의 유유자적함과 처연한 음이 매력적이다.
3번째 트랙에 수록된 '선(keep silent)'은 기타 리프 하나에서 출발해 멜로디, 리듬, 구성, 가사까지 모두 합주에 의해 완성된 곡이다. '벙어리를 선택한 한 인간의 마음속 불'을 그렸다고 하는데, 폭발하는 노이즈와 위압적인 사운드의 강렬함이 지배하는 가장 헤비한 곡이다.
4번 트랙 노을(sunset street)은 이순용이 가장 빠르고 편안하게 쓴 곡이라고 한다. 하지만 다른 곡과 달리 제목은 물론이고 가사조차 못 붙여 애를 먹었는데, 녹음실의 어시스트 엔지니어가 dat레코더에 'nouel'이라고 입력해 놓은걸 보고 이에 공감하여, 노을을 제목으로 하고 이에 대한 가사를 지어 곡을 마무리 했던 에피소드가 있다고 한다. 잔잔한 듯 가슴을 저미는 멜로디가 인상적인 곡으로, 늦가을 대중들에게 어필할 만한 섬세한 감수성이 담겨 있다.
마지막 5번째 트랙의 '념(forget me not)'은 'forget me not'이라는 단편영화의 엔딩 크레딧에 쓸 곡을 부탁 받고, 이를 염두에 두고 쓴 연주곡 이다. 다른 곡과 달리 이 곡의 초안은 기타를 맡고 있는 박각노가 만들었는데, 그의 꿈에 어렴풋이 들려온 두마디 멜로디에서 착안했다고 한다. 단순한 두 개의 코드만으로 놀라울 만치 드라마틱한 기승전결을 이뤄낸 독창성이 돋보인다.
":비록 그 소통의 끝에 또 다른 고립이 있다 한들..." (멤버 이순용의 인터뷰 중)
앨범 전체 타이틀 곡인 '섬(isle)' 과 동일한 잔향의 앨범명은 김기덕 감독의 영화처럼 해석에 따라 의미가 천차만별일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 하나는, 그들이 누군가와 끝없는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고, 언젠가는 그 시도가 빛을 발하리라는 믿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