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atia - PHOENIX 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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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크라티아의 역사를 응축한 70분의 쾌감
Cratia [Phoenix Live]
1. 고출력과 록 밴드
록이라는 장르는 전기 앰프를 사용하면서 발견된 노이즈를 독자적인 미학으로 끌어올리면서 시작되었다. 앰프의 출력을 과도하게 몰아붙일(overdriven) 때 나타나는 찌그러진(distorted) 전기 기타 소리는 록이라는 음악 장르 자체의 성격을 결정짓는다. 전기 기타가 쏟아내는 굉음과 짝을 맞추기 위해서는 다른 악기의 소리도 크고 공격적으로 변해야 한다. 그래서 록 밴드의 드러머는 묵직한 킥 드럼의 저음을 강조하고, 탐탐과 플로어 탐을 있는 힘껏 때리며, 크래쉬 심벌의 찢어지는 소리를 강조하는 연주를 택해야 했다. 스피커를 찢을 듯 터져 나오는 악기 소리 속에서 록 보컬리스트가 존재감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역시 성대를 갈아낼 듯 강하게 목소리를 내는 것 뿐이다. 샤우팅을 넘어 그로울링에 이르는 록 보컬리스트의 창법은 록 밴드 사운드 편성 속에서 자연스럽게 탄생했다.
다시 말해 록의 역사는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이 정도 소리까지는 음악이고, 그 이상은 음악이 아닌 잡음(noise)이라 여겼던 영역의 소리를 음악이라 주장해 온 역사라 할 수 있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음악에 대한 관념에 도전하고, 저항하며, 고집을 부리는 소리의 기록이 바로 록 음악인 것이다.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소리를 만드는 사람들은 가사나 패션, 무대 매너에서도 자연스럽게 그 삐딱한 성격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래서 록이 품은 저항의 이미지는 사회적이기보다 문화적이고 근본적이다. 모든 종류의 과도함 속에서 록은 록다워진다.
2. 록 밴드와 라이브
과함의 미학을 추구하는 록 밴드가 만드는 공연은 어떤 모습일까? 역설적이지만 오버드라이브 톤의 미학을 무대에서 구현하기 위해 록은 테크놀로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단 네 명의 밴드 멤버로 무대 위에서 과함의 미학을 생산하고, 관객에게 짜리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조력자를 요한다. 두 대의 기타(기타와 베이스)로 공연장을 꽉 채운 소리를 구현하기 위해 드라이브계와 공간계 이펙터는 물론 풍성한 소리를 연출하는 코러스 같은 모듈레이션 이펙터도, 때로 전기 악기로 어쿠스틱 악기의 질감을 연출하기 위해 시뮬레이터도 사용한다.
Pink Floyd와 David Bowie 이후 록 밴드의 공연에서 음악 못지않게 중요해진 부분은 조명과 무대 의상, 메이크업, 다양한 무대 장치까지 동원한 시각적 강렬함의 창출이다. 번쩍이고, 찢어진 의상을 입은 아티스트가 연주하는 무대 위를 더욱 비현실적 공간으로 변신시키는 화려한 조명은 록 공연의 핵심 요소가 되었다. Black Sabbath는 헤비 사운드 위에 사이키델릭의 정서를 강조하기 위해, Motley Crue는 슬리즈 메탈 특유의 퇴폐적인 분위기를 강조하기 위해 무대 위로 전문 댄서를 초청하기도 했다. 록 공연은 단순히 시끄럽고 공격적인 음악을 연주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더 강력하고 화끈한 시각적 경험으로 승화시키기 위한 도전이다.
3. 록 밴드의 라이브 앨범
무대 위에서 록 밴드가 만드는 고출력의 연주와 퍼포먼스를 음원으로 만드는 일은, 그것도 밸런스를 갖춘 소리로 재조정하는 작업은 다양한 공력을 요하는 까다로운 작업이다. 스튜디오에서처럼 악기마다 여러 번 녹음 해보고, 가장 맘에 드는 트랙만 고르고 모아 다듬어서 합치는(mix) 작업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연에서 연주한 각 악기 소리에 약간의 손질을 가할 순 있지만, 그 정도는 매우 제한적이다. 라이브는 아무리 믹싱을 해도 밴드의 연주력이 노골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멤버의 컨디션 하나하나가 소리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래서 위대한 록의 전설들조차 여러 공연에서 녹음한 소리 중 가장 최상의 연주가 담긴 노래만 골라 라이브 앨범으로 제작하는 일이 허다하다. Iron Maiden이나 Whitesnake의 도닝턴 공연처럼 어느 하루의 공연을 통째로 음반화 하기 위해서는 개별 멤버의 연주력과 멤버 상호간 합주력에 대한 믿음에, 밴드 고유의 사운드를 이해하는 엔지니어까지 힘을 합쳐야 탄생할 수 있다.
4. 그렇게, 크라티아의 라이브 앨범 [Phoenix Live]
블랙홀의 주상균은 필자와 개인적인 대화에서 “우리가 음악 시작하던 시절 가장 기타를 잘 치던 친구는 이준일”이었다고 여러 차례 들려준 바 있다. 주상균의 증언 뿐 아니라 1980년대 후반 한국 헤비메탈의 짧은 전성기를 수놓았던 여러 아티스트와 팬들이 기타리스트 이준일과 밴드 크라티아가 보여줬던 연주의 완성도와 화려한 무대 매너를 이야기한다. 1988년 컴필레이션 음반 [Friday Afternoon]을 통해 레코딩 데뷔한 크라티아는 [Friday Afternoon] 동기였던 밴드 아발란시와 함께 스플릿 앨범까지 발표하며 패기만만한 행보를 펼쳤다. 안타깝게도 크라티아는 1990년대 초반 활동 정지에 들어갔다. 크라티아의 첫 정규앨범은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2013년에야 세상에 나왔다. 수많은 동료 보컬리스트들의 도움으로 만들어진 복귀작이자 결성 후 25년 만에 완성된 정규앨범에는 한때 L.A.메탈로 불렸던 글램과 슬리즈메탈의 매력이 꼭꼭 눌러 담겨 있었다.
오랜 휴지기 끝에 컴백을 선택하는 밴드는 많다. 그러나 잦은 멤버 교체, 음반 판매 저조 같은 상황에 좌절하며 다시 활동 정지로 돌아가거나, 녹음 스튜디오에 들어가지 못한 채, 생존 신고 같은 공연만 이어가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때 추앙받던 해외 록 밴드 다수의 행보도 그러하다. 반면 크라티아는 복귀작 [Retro Punch!](2013)을 시작으로, [Broken Culture](2015), [Clan Of The Rock](2017), [Phoenix Land](2020)까지 꾸준히 완성도 높은 스튜디오 정규앨범을 발표했다. 행동으로 록 밴드의 길을 증명한 셈이다. 그리고 마침내 감격스러운 라이브 앨범 [Phoenix Live]를 발매한다. 그것도 2022년 4월 23일 홍대상상마당 Live Hall에서 거행된 공연을 통째로 앨범에 담은 담대하고 당당한 음반을.
[Phoenix Live]에는 밴드 크라티아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16곡이 수록되어 있다.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크라티아의 면면을 현재 진행형 크라티아 - 보컬리스트 김영준, 베이시스트 권민조, 드러머 오일정의 연주로 다시 들을 수 있는 일종의 베스트 앨범이기도 하다. 기타리스트이자 리더인 이준일이 들려주는 맛깔나는 리프와 짜릿한 기타 솔로는 왜 수많은 동료와 선후배들이 당대 최고로 이준일을 언급했었는지 공감하게 만든다. 날카로운 핀치 하모닉스를 리프 사이로 짜릿하게 박아넣는 것을 시작으로, 풀링 오프와 해머링 온, 양손 태핑, 더블 스탑, 트릴, 묵직한 벤딩 등이 폭발적으로 쏟아진다. 그러나 자신만을 보여주기 위한 솔로는 없다. 모든 연주는 밴드의 합주 안에서만 이뤄진다. 크라티아 휴지기에도 밴드 음악이 고파서 직장인 밴드라도 쉬지 않았다는 인터뷰처럼 이준일은 철저하게 밴드 사운드를 추구하는 연주만을 들려준다. 그의 화려한 연주는 다른 멤버들의 탄탄한 연주와 정교한 호흡이 뒷받침하기에 가능하다.
[Retro Punch!]부터 함께해 온 드러머 오일정은 탐탐과 스네어의 탄력 넘치는 컴비네이션으로 공연 내내 밴드 사운드에 펀치감을 불어넣는다. 힘과 섬세함, 그리고 꼼꼼함이 공존하는 오일정의 드러밍과 호흡을 맞추는 권민조의 베이스는 존재감을 잘 드러내지 않다가도 기타 솔로가 진행될 때, 혹은 어쿠스틱 스타일의 연주가 펼쳐지는 순간 자신의 진가를 들려준다. 그리고 1989년 스플릿 앨범에 담겼던 “Rock Box”부터 자신이 참여했던 [Phoenix Land] 수록곡까지 한시도 빈틈을 보이지 않는 보컬리스트 김영준이 자리하고 있다. 라이브에서 김영준의 목소리는 일본 밴드 Anthem의 모리카와 유키오를 연상시킬만큼 단단하고 강력한 쇳소리를 선보이는데, 공연의 시작부터 끝까지 청자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게 만든다.
최민수, 김동찬, 게스트였던 김준원, 주상균이 불렀던 크라티아의 지난 노래들은 김영준의 목소리를 통해 더욱 거칠고 묵직하게 다시 태어난다. 하드록 리프 맛집이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이준일의 기타와 어우러지면서 밴드의 역사가 새롭게 정리되는 느낌이다. 기성세대가 정한 음악적 규범에 도전하며 등장한 크라티아가 어느덧 기성세대가 되어가며 느끼는 감정이 담긴 가사가 단단하기 이를 데 없는 김영준의 목소리로 노래가 된다. 나이듦과 록 사이의 묘한 교집합 탄생을 목도하는 기분이다. 완성도 높은 보컬 라인을 위해 초대된 김은비와 박고은의 섬세하고 정교한 코러스는 라이브 연주에서 놓치기 쉬운 지점들을 꼼꼼히 채우고 있다.
하드록의 활기가 가득한 “Fly High”, “Don’t Look Back”, “We Gonna Rock”, “Mirror War”, 왁킹 댄서가 무대에 함께하며 노랫말의 완성도를 시각적으로 구현했던 슬리즈메탈 스타일의 “Rock It Tonight”과 “L.O.V.E. Machine” 등은 록의 쾌감을 전달하는데 한치도 부족함이 없다. 또한 크라티아 초기 히트곡인 “All That I Want (Is You)”의 이란성 쌍둥이라 할 “소녀”를 필두로 한 “영웅의 꿈”, “그대 내 사랑”같은 슬로우록까지 적절히 안배되어 있다. 크라티아의 다양한 면모와 이를 관통하는 록에 대한 열정이 70분 넘는 시간 동안 가득하다. 1980년대 말, 한국의 메탈키드들에게 Dokken, L.A. Guns, Cinderella 같은 연주력과 멜로디를 모두 갖춘 매끈한 한국 글램메탈의 가능성을 보여줬던 밴드가 긴 공백기를 거쳐 동경하던 바로 그 사운드를 자신의 것으로 완성한 모습을 라이브로 만나는 감동은 긴 여운을 남긴다. 그런 점에서 마지막에 배치된 “Hard Headed Woman”(이곡에서는 [Retro Punch!]에서 베이스를 연주했고, 이번 작품까지 크라티아의 사운드를 함께 만들어 온 엔지니어 김형택이 노래를 부른다)과 “Rock Box”를 만나는 순간은 특히 잊지 못할 장면이다.
6. 로커의 역사
처음엔 라이너노트를 준비하기 위해 [Pheonix Live]를 들었다. 그러나 라이너노트를 쓰는 일은 곧 잊혀 버렸다. 록의 근본을 잊지 않는, 록 공연의 매력을 아는,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무대에서 응축하기 위한 땀과 노력이 담긴 사운드에 푹 빠졌기 때문이다. 크라티아의 브레인 이준일을 필두로 오일정, 김영준, 권민조에게 진심을 담은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이 모든 소리를 다듬어 활력 넘치는 라이브 음원으로 정리한 엔지니어 김형택의 손길에도 박수를.
소박하지만 뒤돌아보지 않고 뚜벅뚜벅 자신만의 역사를 음반으로 쌓아가는 록 밴드 크라티아. Rockin’ on Forever, My Rock Box_CRATIA!
2022년 6월 30일
조일동(음악취향Y 편집장)
[CREDIT]
Vocal 김영준, 이준일
Bass 권민조
Drum 오일정
Chorus 김은비, 박고은
Mixing & Mastering 김인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