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지 -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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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과 치유의 음악, 정수지의 「LIFE」
"Listening to Sooji's clear and elegant piano is like spending time sitting by a beautiful river in motion...peaceful... yet always flowing."
"수지의 청아한 피아노 소리를 듣는 것은 마치 아름다운 강가에 앉아 강물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것 같다... 평화롭지만 늘 막힘없이 흐르는..."
by David Lanz 데이빗 란츠
일정한 패턴을 반복하며 자신의 모양을 찾아가는 것은 자연의 특징이다. 눈의 결정이나 나뭇가지의 모양과 같이, 정수지의 음악 또한 이러한 특징을 띠고 있다. 정수지 음악의 반복되는 멜로디를 따라가다 보면, 규칙적인 심장의 리듬을 느끼게 되고, 선율이 이끄는 길로 빠져들게 된다. 마치 추의 움직임을 따라 최면에 빠져들듯. 이 독특함의 원인은 무엇일까?
David Lanz라는 두 개의 문
몸이 약해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던 정수지는 피아노를 친구삼아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시간이 흘러 중학교 2학년이 된 정수지는 명상의 시간을 기다린다. 그 시간에는 David Lanz의 ‘Leaves on the Seine’이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그 음악이 정수지의 마음에 각인되었다. 명상과, 음악과, 그 음악을 따라 낯선 곳으로 떠밀려간 듯한 강렬한 느낌. 그 강렬한 느낌이 예민한 정수지를 사로잡았고, 어릴 때부터 막연히 즐기던 음악에는 의미가 생겼다. 마음 가는대로 피아노를 치다가 어느 순간 전혀 다른 시공간으로 훅- 떠밀려가는 듯한 짜릿한 일탈의 경험! 말보다 먼저 들이닥친 깨달음의 순간, 에피파니(epiphany)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개인적인 즐거움이었을 뿐이다. 그 때, David Lanz로 인해 또 하나의 문이 열린다. 2013년. 정수지는 미국 여행 중 우연히 David Lanz의 워크숍 소식을 접하고 그곳으로 달려간다. 어린 시절 영혼을 흔들었던 음악의 주인공과 24년 만에 드디어 만나게 된 것이다.
워크숍이 열린 곳은 두 대의 그랜드 피아노가 있는 가정집이었다. 워크숍을 시작하며, 선생은 자기소개를 대신해 피아노를 쳐 보라고 했다. 그 때 정수지는, 기존의 곡들을 치지 않고 오랫동안 홀로 해 오던 즉흥 연주를 시도했다. 처음이었다. 그 순간, 정수지의 음악이 처음으로 타인과 만난 것이다. 아무 계획 없이, 두려움과, 설렘과,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정체모를 감정들을 모두 쏟아낸 첫 번째 즉흥곡. 그것이 이 앨범의 대표곡 ‘life’다. 이것이 음악가로서의 정수지가 깨어난 순간이다. 음악으로 낯선 사람들과 교감한 기적의 순간. 그 순간이 정수지에게 준 것은 ‘무의식이 하나의 작품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었고, ‘그것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강렬한 믿음이었다. 여기 실린 모든 곡은 모두 이런 과정으로 만들어진 ‘즉흥 연주’이다.
즉흥 연주만의 매력
정수지가 즉흥 연주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마음을 비우는 것이라고 한다. 중요한 것은 ‘시작’이다. 고요한 연못에 물방울을 하나 떨어뜨리듯, 고요한 마음에 최초의 한 음을 누른다. 그러면 그 첫 음이 파장을 일으켜 다음 음을 불러낸다. 연못에 이는 물결같이, 음악이 출렁이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나의 음이 하나의 곡이 된다.
이러한 ‘즉흥’의 특성 때문에 정수지의 곡에는 몇 가지 두드러진 특징이 나타난다. 첫째는 ‘특정 패턴의 반복’이고, 두 번째는 ‘머뭇거림’이다.
이 앨범에 수록된 곡들은 모두 즉흥 연주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처음 녹음한 것 그대로를 실은 곡은 1, 8, 9 트랙 세 곡 뿐이다. 그 중에서도 8번 Waving Aurora를 들으면 ‘그 순간 그 공간의 느낌을 그대로 공유한다’는 ‘명상 치유로서의 음악’의 역할을 짐작할 수 있다. 음악 중간중간에 느껴지는 머뭇거림은 즉흥 연주만의 특징이며, 북구의 어두운 하늘에 떠있는 신비한 물결인 ‘오로라’의 아련한 느낌을 전해주는 연주자의 특징적 호흡이다. ‘머뭇거림과 호흡’. 이것이야말로 다른 누구에게서도 볼 수 없는 정수지만의 인장이다.
패턴, 반복, 명상, 그리고 치유
즉흥을 다시 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즉흥이 아니다. ‘즉흥을 재현한다’는 모순과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정수지만의 접근 방식이 나머지 여섯 트랙의 특징이다. 즉흥적으로 태어난 작품을 다시 듣는 순간, 그 곳에는 분석이 개입된다. 제목도 테마도 없이 태어난 곡을 다시 들으며, 정수지는 비로소 그 음악이 의미하는 바를 해석해 내고, 제목을 붙이고, 그 때의 자신을 이해하게 된다. 이름 붙이기 어려운 감정의 덩어리를 복잡한 실타래 풀어내듯 이해하는 과정. 무의식이 이해 가능한 음악의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는 이 과정이 바로 ‘명상’과 ‘치유’이다. 정수지의 음악에 ‘명상’과 ‘치유’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는 이유다.
복잡한 실타래를 풀어가는 실마리는 ‘패턴과 반복’이다. 특정한 패턴을 반복?변주하며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것이 자연의 특징이라고 앞서 말한 바 있다. 이것을 ‘프랙탈fractal’이라고 부른다. 정수지의 음악도 프랙탈이다. Lovers Dance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사랑스러운 멜로디는 ‘만약에, 만약에’라며 상상을 펼쳐가는 연인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시작되는 연인의 설렘과 두려움. 내 마음을 보여주고 싶지만, 그런 마음을 들키기는 싫은 가장 다정한 전쟁. 그것이 이 곡의 주된 정조이다. 그것은 또 다시 ‘만약에-’라고 말하는 듯한 소박한 멜로디로 압축된다. Born in Light는 무언가 태어나듯 상승하는 음이 반복 변주되면서, 이 곡이 태어난 호주의 독특한 정조를 만들어낸다. Step into Fall은 보스턴에서 걸었던 공원의 느낌을 재즈풍 멜로디의 반복을 통해 만들어 낸다. Longing Heart의 바로 옆 건반에서 머뭇대는 멜로디는, 누군가를 그리워하기 때문에 쉽게 발을 떼지 못하는 ‘기다림의 몸짓’을 음악에 끌어들인 듯 하다. Summer Sings는 새들이 따라하듯 멜로디를 주거니 받거니 반복하다가, 갑작스런 폭우를 연상시키는 단절이 있은 후, 비 고인 물 속을 텀벙대듯 멜로디가 변형된다. 그러면 어느새 숲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풍경이 그려진다. 정수지의 음악이 이러한 특징이 보이는 것은, 무의식에 접근하는 정수지의 즉흥 연주 방식이 자연과 닮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음반에 실린 곡의 흐름 역시 자연의 순환과 닮아 있다. 싹을 틔우는 계절의 초입인 Budding(Intro)으로 시작해서 Lovers Dance; 봄, Born in Light; 초여름, Summer Sings; 한여름, Step into fall; 초가을, Longing heart; 늦가을, Waving Aurora; 초겨울 White in distance(outro); 한겨울의 흐름을 그린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담고 있는 ‘Life’는 모든 계절을 한 곡에 압축해서, 겨울이 시작되기 전인 이 앨범의 클라이맥스 부분에 자리하고 있다.
자연은 의도가 없다. 그러나 그 결과물은 아름답다. 그리고 저마다 완결되어 있다.
자연을 닮은 정수지의 음악에도 그녀만의 독특한 아름다움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시작하는 연주자의 이 첫 음반은 앞으로 반복, 변주될 음악 세계의 부분이자 전체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정수지의 음악세계가 기대되는 이유다.
글 / 이은영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