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반에 이르는 그나마 길지 못했던 국내 락 음악의 역사는 1975년 소위 ‘긴급조치’라는 족쇄에 붙들려 그동안 쌓아왔던 그 모든 것을 한순간에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나마, 디스코라는 새로운 유행에 편승할 수 있었던 나머지 몇몇 그룹들은 고고 클럽의 어둠 속으로 숨어버리고, 그렇지 않고 밝은 곳에서 활동하고 싶었던 밴드 마스터나 보컬 출신의 음악인들은 트롯과 고고가 믹스된 ‘트롯 고고’내지는 ‘록뽕’이라는 신 조어를 탄생시키며 히트 챠트를 오르내리게 된다. 물론, 그 모든 활동들이 위에 이야기 했던 시기인 60년대 말에서 70년대에 이르는 소위 국내 락의 르네상스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어쩌면 국내 락에 있어서 가장 어두웠던 암흑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이 보이지 않던 암담했던 시기에 락 음악이 다시 한번 새로운 출발을 하게된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긴급조치’라는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집단을 배경으로 했던 ‘대학 가요제’였다. 물론 여기서의 대학 가요제란, MBC라는 한 방송국에서만 개최되었던 행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학가요제를 필두로 여타 방송국들에서 앞다투어 만들어진 캠퍼스 페스티벌 모두를 일컫는 말이다. 1977년 처음으로 열렸던 MBC 대학가요제에서 서울 대학교 농과대학 출신의 그룹 샌드 페블스의 대상 수상은 다른 캠퍼스 그룹들에게는 자신감을 또 지금까지의 성인(!)가요에 식상해 있던 젊은 청자들에게는 또 다른 신선함으로 다가왔음에 틀림없다.
그때부터 캠퍼스 그룹들의 무대는 한해에 한 두 번 열리던 정기 발표회나, 교내 축제의 초대가수의 자리에 국한되지 않고, 보다 크고 보다 많은 청중들이 있는 자리로 옮겨갈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들이 가요제를 통해서 발표하는 많은 곡들은 어쩌면 ‘락’이라는 원초적인 음악에 접근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가요제 수상의 후광을 얻은 이들의 발표회에 빠짐 없이 등장하는 해외 그룹들의 레퍼토리들인 ?K 퍼플(Deep Purple)이나, 그랜드 펑크 레일로드(Grand Funk Railroad), 유라이어 힙(Uriah Heep), 또는 레드 제플린(Led Zeppelin)등의 커버곡 들은 이들의 숨은 실력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출연하는 TV 프로그램이나 몇몇 발표회를 접하면서 한구석 석연치 않은 부분이 바로, 창작곡에 대한 문제였다. 종주국의 음악들은 그렇게 잘 연주하고 노래하면서, 자신들의 음악을 할 때는 그 원초적인 힘이 없을까 하는 문제 말이다.
마그마라는 그룹의 위치는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수없이 명멸했던 많은 캠퍼스 그룹들 가운데에서 단연 독보적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학가요제의 예선에서부터 보여줬던 그 파워풀한 연주와 하이톤의 보컬은 ‘드디어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라는 웬지 모를 뿌듯함을 안겨주었던게 사실이다. 마그마는 베이스 기타와 보컬을 담당하는 조하문에 의해 결성된 그룹이다. 조하문은 이미 1978년 대학 입학 당시 아스펜스(Aspense)라는 5인조 그룹에서 기타를 담당했고, 기타리스트가 탈퇴하는 바람에 포지션을 베이스로 옮기게 된다. 이후 가장 소규모의 편성으로 밀도있는 음악을 하려 재 편성한 팀이 바로 마그마 이다. 그가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어린 시절 그에게 가장 충격적으로 들렸던 국내의 락 음악은 베이스 라인이 인상적인 신중현과 엽전들 '저 여인'이었고, 그들 역시 3인조의 가장 기본적인 락 음악의 편성이라는 점도 재 편성되는 그룹의 인원을 3인조로 만드는 중요한 이유중의 하나로 자리잡게 된다.
일반적으로 볼 때 3은 완성의 숫자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 중 하나만 제 위치를 잡지 못했을 때에는 쉽사리 그 균형이 깨어질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는 숫자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마그마(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그룹 이름도 3음절로 되어있다.)가 3인조로 출발할 당시 그들의 자신감을 엿볼 수 있으며, 80년 MBC 대학 가요제의 시상식 장면 은상을 호명 받았을 때 다른 팀과는 대조적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단상으로 오르던 마그마의 모습은 그때까지 그들 자신의 음악에 얼마나 자신감에 충만해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예였다.
대학가요제에서의 은상 수상 이후 공중파 방송이나, 각 대학의 축제등에서 이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으나, 드럼을 맡고 있던 문영식의 도중 하차는 그룹의 존속을 더 이상 어렵게 만들었다. 위에서 이야기했던 삼각형의 한 꼭지점의 자리 이탈이라고나 할까.
81년 말 MBC에서 주최했던 '독립 기념관 모금'행사에 새로운 드러머와 함께 참여한 이후 국내 락 음악계에 있어서 더 이상 마그마라는 이름은 찾아보기 힘들었고, 조하문은 몇 년이 지난 후 솔로로 데뷔해서 대중적으로 사랑 받는 '가수'로 거듭나게 된다. 대학가요제에서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마그마의 유일한 음반을 살펴보자. 고등학교시절 외국에서 밴드 활동을 했던 기타리스트 김광현의 현란하지만, 기본에 충실한 플레이와 "나이프 조"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던 조하문의 날카로운 보컬은 이전 대학가요제에서 볼 수 있었던 여타 스쿨밴드들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아름다운 곳’에서 보여주는 도발적인 보컬은 국내 락의 역사에 있어서 전대미문의 것이었고(이 곡 때문에 외국의 락 메니아 들은 이들을 일본 밴드 플라워 트레블링 밴드 (Flower Travelling Band)와 비교하기도 한다.) ‘잊혀진 사랑’(원래의 제목은 ‘4차원의 세계’였지만 심의에 걸려서 ‘잊혀진 사람’으로 제목이 바뀌었고, 음반이 발매될 당시 오타로 인해서 ‘잊혀진 사랑’으로 표기되었다.)의 점진적인 몰입은 전성기 종주국의 사이키델릭 밴드들에 비견될 만 하다. 전문 엔지니어의 손을 거치지 않은 답답하고, 악기의 특성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녹음이 너무 아쉽게 느껴지는, 척박한 현실 속에서 태어난 한국 락의 금싸라기 같은 명반이다.
마지막으로 이 음반의 상업적인 성공의 유무를 떠나서 깨끗한 마스터 음원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세상에 다시 빛을 보게해준 비행선 레이블의 관계자 여러분들게 한국 락을 사랑하는 팬 가운데 한 사람으로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