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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 - 멈추지 말아요 / 그대생각 (2CD) [1집+2집 합본반]

전설의 헤비메탈 밴드 ‘무당’

헤비메탈의 불모지였던 한국에 전통 미국식 록/메탈을 알린 무당의 앨범 1집2집 합본 재발매 리더인 최우섭 전곡 작사/작곡으로 보컬에 지해룡 베이스 김일태 드럼 한봉 대한민국의 록/메탈계에 시작을 알리는 1집과 2집 통합 에디션 음반 후배 뮤지션 들로부터 존경과 선망의대상이었던 그룹’무당’ 이들이 있어 시나위/백두산 등등 후배 록 밴드의 모태가 되어 현재까지도 전설로 남아있다.

명성에 비해 활동기간이 짧고 80년대 국내 음악에서 소외된 부분도 없진 않지만 이들이 있었기에 현재 국내 록/메탈이 자리를 잡을수 있었다. 이번 음반은 1집과2집 2CD 에디션으로 발매되어 더욱더 기대되는 음반이다.

1980년대초 국내에 본격 헤비메틀의 시작을 알리고 차별화된 노선을 걸었던 무당!
당시 화려한 무대매너로 각인된 그들의 1집과 2집, 서사적 느낌으로 클래시컬한 면모를 보여준 “무지개”와 정통메틀을 지향하는 기타리프가 돋보이는 “그길을 따라” 그리고 오랜 애청곡이며 최근 이현우에 의해 리메이크 됨으로 새롭게 이슈가 되고 있는곡인 “멈추지 말아요”(원곡 : Please Dont Stop)가 수록된 한국의 초기 헤비메틀의 역사를 가늠해보게 하는 귀중한 앨범.

국내 헤비메틀의 첫 단추를 꿴 그룹

국내 헤비메틀의 시작은 물론 시나위의 첫 번째 음반을 꼽아야 하겠지만, 그 이전에도 미미하나마 헤비메틀의 본질에 근접하는 여러 그룹들이 존재했다. 이미 재발매된 마그마의 음반과 작은 거인의 두 번째 음반, 또 이번에 재발매된 무당의 경우가 그렇다. 특히 무당은 자신들 스스로 본격 헤비메틀을 외치며 다른 그룹들과는 차별화된 노선을 걸었지만, 당시 국내 여건의 미비로 가장 많은 피해를 본 그룹이 아닐까 한다.

무당의 음반 데뷔는 비록 1980년이었지만, 이들의 결성은 197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고 있던 재일 교포 2세들이었던 최우섭(G), 한봉(D), 피터(B)에 의해 결성되었고, 학교 선후배 사이였던 이들에 L.A.에 살고있던 장화영(K)과 정진(G)이 합류하면서 5인조 그룹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결성 이후 이들은 그들의 주거지역이었던 샌프란시스코와 L.A., 그리고 뉴욕을 근거지로 하여 대학가 젊음의 축제에 참여하거나, 매년 콘서트를 개최하여 교포사회를 중심으로 조금씩 그 이름을 알려가기 시작한다.

이들이 국내에 알려지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1980년 6월에 당시 아이들 스타였던 레이프 개럿의 내한공연이 있었는데, 이벤트에 관여했던 최우섭이 당시 사랑과 평화를 오프닝으로 세우려고 했던 계획이 차질이 생겨 직접 자신의 그룹을 이끌고 내한하게 된 것이다.
레이프 개럿의 공연이 크게 성공함과 동시에 이들의 존재도 많은 청중들의 가슴에 각인되면서, 오아시스 레코드와 2장의 음반계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당시까지 국내에서 들을 수 없었던 공격적인 기타 사운드와 에너지에 넘친 이들의 무대는 음반 제작자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첫 번째 음반은 이렇게 순조롭게 국내에 발표될 수 있었다.
하지만 호사다마랄까, 국적이 미국이었던 이들에게는 비자문제라는 또 다른 걸림돌이기다리고 있었다. 첫 번째 음반은 발매되었지만, 제대로 된 홍보나 공연 한번 해보지 못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3년 뒤, 다시 고국을 찾은 이들은 오아시스 레코드와의 계약대로 두 번째 음반을 발표한다. 이때의 멤버는 원년 멤버였던 최우섭과 한봉, 그리고 김일태였다. 재발매된 음반의 자켓에는 지해룡의 모습도 등장하지만, 레코딩 시에는 참여하지 않고 음반 발매 이후 공연에서 함께 활동했던 멤버였다.

첫 번째 음반이 발매된 지 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국내의 사정은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다. 국내에 하드락을 연주하는 그룹은 거의 없었고, 그나마 복사판을 주로 사서 듣거나 음악다방을 기웃거리건 락 매니아들 조차 국내의 음악인들에게는 거의 관심도 없었다. 그래서 이들이 채택한 방법 가운데 첫 번째는 TV무대를 이용한 적극적인 자기소개였다. 젊은층들이 많이 시청하던 영11이나, 젊음의 행진 그리고, 쇼 2000과 같은 프로그램에서 보여진 이들의 모습은 당시 충격이라고 불릴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특히 천편일률적인 가요와 가수들이 쇼 무대를 장악하고 있을 당시, 한봉과 새로 가입한 보컬 지해룡이 펼치는 즉흥적인 드럼과 오고의 솔로 배틀 등은 외국의 락만을 선호하던 국내 락 매니아들의 관심을 돌려놓을 만큼 설득력이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방법은 당시로선 생소하기 이를 데 없던 라이브 콘써트였다. 그때까지 그러한 단어조차 변변히 없었던 시절, 이들은 이태원의 써비스 맨 클럽(Service Man Club)자리에 소극장을 하나 얻어서 그들과 노선을 같이하는 그룹들을 하나 둘씩 규합하기 시작했다. 기존에 클럽에서 연주하던 25시, 믿음 소망 사랑, 김태화와 타이거스를 비롯, 캠퍼스 페스티벌 출신의 스타들이었던 송골매, 작은 거인등과 함께 합동콘서트를 기획하는 등, 국내에도 라이브 문화의 뿌리를 조금씩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때의 모습은 장길수 감독의 영화 밤의 열기 속으로를 통해 간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밤의 열기 속으로의 배경이 바로 이태원이었고, 무당은 영화음악을 맡아 영화의 한 장면에 그들의 공연 모습이 담겨있기도 하다.
하지만 쉴 새 없는 공연과, 용평 팝 페스티벌과 같은 대규모 행사에 참여하는 등 척박한 국내 락의 현실을 정면으로 돌파하고자 했던 의들의 노력은 계속되는 무관심과 그에 따르는 경제적인 압박 앞에 힘없이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당시 한 음악잡지의 기사에는, 이태원의 입구에서 군고구마 장수를 하는 최우섭과 김일태의 모습이 사진으로 담겨 나오기도 했다. 아쉽게도 그로부터 머지 않아 그룹 무당의 이름은 더 이상 국내 락 계에서 거론되지 않았다. 첫 번째 음반에 함께 참여했던 이중산은 이후 국내 락 기타의 전설적인 인물로 현재까지도 기인 기타리스트로 추앙받고 있으며, 보컬리스트 지해룡은 자신의 그룹 락 코리아를 이끌며 잠시 활동했다. 드러머인 한봉은 재결성되는 들국화에 몸을 실었지만, 대마초사건에 연류되어 한동안 연예계를 떠난 바 있다. 첫 독집음반에 참여했던 장화영은 이후 장영이라는 이름으로 역시 H2O를 결성하여 활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