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erre Fournier (피에르 푸르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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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로의 프린스’피에르 푸르니에
베토벤: 첼로 소나타 전곡 (1~5번)
+ 슈베르트: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전곡)
+ 안톤 루빈슈타인: F장조 멜로디
‘첼로의 프린스’ 피에르 푸르니에가 인류에 남긴 위대한 유산!
‘첼로의 구약’에 비견되는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에 이어, ‘첼로의 신약’으로 일컬어지는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를, ‘첼로의 프린스’ 피에르 푸르니에와, 역사상 최초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을 레코딩한 아르투르 슈나벨이 함께 연주한 기념비적인 음반.
“피에르 푸르니에가 아르투르 슈나벨과 함께 연주한 베토벤 첼로 소나타 전곡은, 클래식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찾아온 커다란 행운이다.”- 툴리 포터
1937년 녹음된, 전설로 존재하던 ‘장 위보’와의 슈베르트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전곡 녹음도 최초 수록.
■ 1937년 ~ 1948년 모노녹음으로, 1997년 디지털리마스터링 작업을 거쳤으나, 마스터 테잎에서 비롯된 약간의 잡음이 섞여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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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첼로의 프린스’ 피에르 푸르니에
‘번개는 같은 곳에 두 번 내리치지 않는다.’라는 속담은 음악계에서는 잘 들어맞지 않는 말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네 번이라면 어떨까? 어느 누가 불과 14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프랑스에서만 피에르 푸르니에, 앙드레 나바라 (Andre Navarra), 폴 토르틀리에 (Paul Tortelier) 그리고 모리스 장드롱 (Maurice Gendron) 같은 위대한 첼리스트가 동시다발적으로 출현했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을까? 이들은 폴 바젤레르 (Paul Bazelaire)와 모리스 마레샬 (Maurice Marechal) 이후 19세기 말 프랑스학파 첼리스트의 계보를 잇는 가장 위대한 이름들이다. 이 네 명의 첼로 거장들은 클래식 음악 역사에 있어서, 파블로 카잘스 (Pablo Casals)가 첼로라는 악기의 위상을 드높였던, 그리고 브람스, 드보르작, 포레, 드뷔시, 엘가와 같은 작곡가들이 위대한 바이올린 작품에 필적 할 만한 첼로 레퍼토리를 만들어냈던, 가장 최적의 시기에 음악계에 등장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네 명의 등장 이전에도 스페인 북부의 갈리시아 지방 출신의 엠마누엘 포이어만(Emanuel Feuermann)이나, 러시아의 그레고르 피아티고르스키(Gregor Piatigorsky )와 같은 훌륭한 연주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카잘스 이후 30년 만에 등장한 피에르 푸르니에야 말로, 당시 프랑스 출신 첼리스트의 새로운 세대를 대표하는 가장 핵심적인 인물로 평가된다는 것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피에르 레옹 마리 푸르니에(Pierre Leon Marie Fournier)는 1906년 6월 24일 프랑스 파리의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가스톤(Gaston)은 기품 있는 군인이었고, 푸르니에의 어머니 가브리엘르(Gabrielle)은 피아니스트, 그리고 그의 남동생 장(Jean)은 당시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였다. 따라서 푸르니에의 집안에는 항상 음악이 흐르곤 했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던 푸르니에는 소아마비를 앓게 되면서 다리를 자유롭게 움직이기 어렵게 되었고, 이로 인해 피아노 연주 때 필요한 페달을 밟을 수가 없게 되었다. 앉아서 연주할 수 있는 악기인 첼로는 이런 어린 푸르니에에게 완벽한 대체 악기였고, 그는 아홉 살이 되던 해에 첼리스트 오데트 크레틀리(Odette Krettly)에게 첼로 레슨을 받기 시작하였다. 푸르니에는 후에“나는 크레틀리 선생님의 독특한 가르침으로, 악기를 연주함에 있어서 필요한 기술적인 인내심과 인토네이션(연주를 정확한 음조로 하는 것), 그리고 악구의 조절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또한 음악이 내는 소리의 각기 다른 컬러도 배울 수 있었다” 라고 밝혔다. 푸르니에는 프랑스 파리 음악원에서 폴 바젤레르(Paul Bazelaire), 앙드레 헤킹(Andre Hekking) 등을 사사했고, 1923년에는 음악원 최우수 학생으로 뽑히기도 하였다. 또한 함께 음악을 공부하던 동기 중에는 훗날 훌륭한 실내악 음악가로 알려진 카뮈 슈비야르(Camille Chevillard)와 뤼시앵 카페(Lucien Capet)도 있었다. 푸르니에는 이후 연극 무대나 카지노, 극장에서 연주하기 시작하였고, 스승이었던 오데트 크레틀리의 여동생인 피아니스트 자닌 크레틀리(Janine Krettly)와 함께 리사이틀을 열기도 하였다. 그런 후에 그녀의 오빠인 로버트 크레틀리(Robert Krettly)가 이끄는 현악 사중주단에 합류해서, 클라라 하스킬(Clara Haskil)과 함께 공연을 하기도 했으며, 포레의 현악 4중주를 연주하기도 했다. 푸르니에는 라벨의 《샹송 마데카스(Chansons madecasses)》 초연 무대에서 앙드레 헤킹 대신 연주하기도 했으며, 푸르니에의 첫 협주곡 연주 데뷔는 1925년 콜론 관현악단과 마크 델마(Marc Delmas)의 아리에주아 주제의 의한 랩소디 (Rapsodie sur des themes ariegeois)의 공연이었다. 1927년 푸르니에는 자신의 자리를 앙드레 나바라에게 넘겨주며 크레틀리 사중주단에서 물러났다.
피에르 푸르니에는 1934년 12월에 위그모어홀(Wigmore Hall)에서 있었던 그의 공식적인 런던 리사이틀 데뷔에 앞서 오케스트라 수석으로 처음 영국을 방문하였고, 몇 달 후 그는 현지 언론들을 통해 “프랑스에서 온 놀라운 첼리스트’로 불려지며 이올리언홀(Aeolian Hall)에서 장 위레의 첼로 소나타를 영국에 소개했다. 1935년 또 한번 푸르니에의 커리어에서 중요한 순간이 오게 되는데, 바로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첼로의 전설 카잘스가 지휘를 맡은 공연의 첼로 솔로이스트로 서게 된 것이었다. 1937년에는 영국 남부지방 도시인 본머스에서 생상의 첼로 협주곡 1번의 연주 실황을 BBC방송에서 방영하기도 했다. (1939년엔 같은 공연장에서 하이든의 첼로 협주곡 2번을 연주했었다.) 같은 해, 파리로 돌아온 푸르니에는 자신의 음악 인생에서 첫 레코딩을 하게 되는데, 이 레코딩은 ‘라 브와 드 송 메트르 (La Voix de son Maitre, VSM, ‘His Master’s Voice’) 로고를 달고 파테-마르코니 (현재 EMI 프랑스의 전신인 음반회사)에서 발매되었으며, 알베르 루셀(Albert Roussel)의 첼로 콘체르티노(작은 협주곡)의 최초 레코딩이 실려있었다. 1939년에서 40년 사이에는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의 작곡가 보후슬라프 마르티누가 푸르니에에게 헌정한 두 개의 작품, 즉 첼로 협주곡 1번의 수정본(샤를르 뮌쉬 지휘)과 첼로 소나타 1번 (루돌프 피르쿠스니 피아노)을 초연하기도 했다. 1939년 1월 11일 푸르니에는 드디어 폴 파레의 지휘 아래 하이든 첼로 협주곡으로 베를린 필하모닉 무대에 데뷔하게 된다. 1943년에는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 피아니스트 알프레도 코르토(Alfred Cortot), 바이올리니스트 자크 티보(Jacques Thibaud)로 이루어진 전설적인 카잘스 트리오에, 카잘스를 뒤이어 첼리스트로 참여하기도 했으며, 이후 독일 베를린으로 돌아와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뱅글러(Wilhelm Furtwangler)와 함께 총 4번의 슈만 협주곡 공연을 펼쳤고, 다음 해인 1944년에는 같은 공연을 뮌헨에서 열기도 하였는데, 프랑스인으로서 당시 적대국인 독일에서의 이러한 공연은 당시 모국인 프랑스에서 안티-푸르니에 감정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이는 곧 사라졌다.
1945년 푸르니에는 로열 알버트 홀에서 차이코프스키의 로코코 변주곡과 랄로의 첼로 협주곡 연주를 위해 런던을 방문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정기적으로 영국을 방문하여 BBC방송의 교양프로그램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946년 런던에서 푸르니에는 미국 태생의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슈나벨(Artur Schnabel), 벨기에 태생의 바이올리니스트 아르투르 그뤼미오(Arthur Grumiaux)와 함께 베토벤 삼중 협주곡을 연주하였으며, 1947년에는 프라하 봄 음악축제에 참가하여 지휘자 라파엘 쿠벨릭(Rafael Kubelik)이 이끄는 체코슬로바키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드보르작 첼로 협주곡을 협연했다. 같은 해, 첫 번째로 열린 에딘버러 페스티벌과 런던에서는 아르투르 슈나벨과 요제프 시게티(Joseph Szigeti) 그리고 윌리엄 프림로즈(William Primrose) 등과 베토벤, 브람스, 멘델스존, 슈베르트의 실내악곡을 연주하기도 하였다. 리즈 음악 페스티벌에서는 독일 태생의 영국인 자선사업가 로버트 메이어와 도로시 메이어 부부(Robert and Dorothy Mayer)가 주최한 어린이들을 위한 음악 콘서트에서 연주했다. 1948년, 푸르니에는 취리히에서 오트마 쉐크의 협주곡을 초연하였으며, 첫 미국 투어를 떠나기도 했다. 프랑스 태생의 작곡가 프란시스 풀랑(Francis Poulenc)은 푸르니에에게 첼로 소나타를 헌정하였는데, 이 곡은 1949년 5월 파리에서 초연되었다. 푸르니에는 바로 다음 달에도 런던에서 같은 곡을 연주하였고, 1971년 작곡가 풀랑의 체임버 작품 전집을 위하여 풀랑의 친구인 자크 페브리에(Jacques Fevrier)가 피아노를 맡아 우정 어린 레코딩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후 푸르니에는 EMI와의 레코딩에서는 더 이상 이 곡을 녹음하지 않았다.) 역시 1948년에 푸르니에는 영국 로열 알버트 홀에서 아드리안 볼트 경(Sir Adrian Boult)과 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최초로 연주하였는데, 그의 동료 첼리스트인 토르틀리에나 나바라 만큼 이 곡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곡이 요구하는 애잔한 감정을 잘 표현했다는 평을 들으며, 1951년 지휘자 존 바비롤리 경(Sir John Barbirolli)이 이끄는 할레 관현악단과 다시 한번 이 곡을 연주하기도 했다.
1949년 11월 피에르 푸르니에는 지휘자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Leopold Stokowski)가 이끄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으로 카네기홀 데뷔 공연을 열었으며, 슈만의 첼로 협주곡을 연주하였다. 1950년 에딘버러 축제에서는 프랑스 작곡가 블로흐(Bloch)의 셸로모(Schelomo)를 (그가 개인적으로 숭배하지는 않았던) 영국 태생의 지휘자 토마스 비첨(Sir Thomas Beecham) 경과 공연하였다. 푸르니에의 음악경력에 있어서 1950년대에서 60년대는 매우 성공적인 국제무대로의 진출을 의미한다. 1954년 푸르니에는 빌헬름 켐프(Wilhelm Kempff)와 듀오를 결성(이 듀오는 후에 헨릭 쉐링(Henryk Szeryng)이 합세하여 트리오로 확장)하여 첫 일본투어를 나섰으며, 1955년엔 남아프리카에 이어 같은 해 에딘버러 축제에서 지노 프란체스카티(Zino Francescatti), 솔로먼 커트너(Solomon Cutner)와 짝을 이뤄 트리오 공연을 열기도 했다. 1959년 푸르니에는 소련을 방문했으며, 각각 1965년과 66년에는, 지휘자이자 작곡가이기도 했던 장 마르티농(Jean Martinon)과 스위스 작곡가 프랭크 마르탱(Frank Martin)의 첼로 협주곡 초연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1970년에 이후부터는 지난 1956년부터 정착하여 지내오던 스위스 제네바의 집에 머무르며 남은 여생을 보냈고, 1986년 1월8일 그 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프랑스 파리에 있는 유수의 음악 교육기관에서 교육자로서도 활동했었는데, 1937년에서 39년까지는 프랑스 최고 교육기관인 에콜 노르말에서, 1941년부터 49년까지는 파리 음악원에서 가르쳤으며, 여러 곳에서 마스터클래스를 열기도 하였다.
피에르 푸르니에의 우아하면서 귀족적인 연주 스타일은 그가 “표현의 혼”이라고 칭하는 첼로의 활을 최고의 수준으로 조절하는 그의 연주 능력에서 비롯되며, 그러한 나긋나긋하면서도 특유의 아름답게 고정된 톤의 연주는 그가 녹음했던 많은 연주에서 들어볼 수 있다. 아쉽게도 푸르니에는 그의 스승이었던 오데트 크레틀리의 오빠인 로버트 크레틀리가 결성한 크레틀리 사중주단과는 그 어떤 녹음도 남기지 않았는데, 포레와 라벨의 작품 레코딩에서는 그가 아닌 나바라가 참여했었고, 파리의 클래식 음악 레이블 라 앙투르쥐 소노르 (L’Anthologie Sonore)를 통해 남동생 장과 함께 했던 소수의 레코딩 외에는 1930년대 말 이전까지 자신의 연주를 거의 녹음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 앨범에는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녹음이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들려지는 푸르니에의 연주가 혹여 엠마누엘 포이어만이 남긴 현대적인 연주보다 말끔한 사운드는 아니더라도 그의 풍부하고 우아한 연주 스타일은 1937년 이전에 이미 모든 클래식 작품들을 통해 확립되어 있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1946년에서 1953년에는 푸르니에가 현재 EMI 프랑스의 전신인 VSM 레이블과의 계약에서 당시 최고의 음반 프로듀서이자 흥행지휘자로 이름을 날리던 월터 레게(Walter Legge)의 간청으로 모회사 격인 런던의 HMV(현재 EMI Classics의 본사)로 이양되었는데, 이 시기에는 푸르니에의 디스코그라피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여러 레코딩이 많이 탄생되었다. 클래식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큰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을만한 발견은 바로 슈나벨과 함께 녹음한 베토벤 소나타 전곡이다. 이 것은 푸르니에의 레퍼토리에 있어 가장 중심적인 작품이며, 함께 녹음했던 슈나벨은 카잘스, 막스 볼드너(Max Baldner), 피아티고르스키와 같이 당대 최고의 뛰어난 첼리스트들과 이미 이 곡을 연주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곡에 대한 이해도 매우 뛰어났었다. 푸르니에와 슈나벨의 레코딩은 당시 사용되던 78rpm(녹음 가능 시간이 약 5분 정도) 레코드 시대의 가장 후기에 녹음되었기 때문에 LP 레코드가 개발된 후에나 발매될 수 있었다고 한다. - Op. 5 No.2 는 78rpm 레코드로 발매된 사실이 없다.
매우 안타깝게도 어떤 이유에서 인지 EMI는 푸르니에 같은 훌륭한 연주자에게 보다 강력하게(?) 레코딩 제안을 하지 않았는데, 1955년 9월 스톡홀름에서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와 만나게 된 푸르니에는 (그들은 1947년부터 알고지낸 사이였다) 오이스트라흐의 반주자로 활동하던 피아니스트 빅토르 얌폴스키(Victor Yampolsky)와 함께 EMI의 동의 하에 스웨덴 라디오 스튜디오에서 레코딩 작업을 하게 되었다. 푸르니에와 오이스트라흐(David Oistrakh)는 당시 최고의 클래식 레코딩 프로듀서였던 월터 레게를 설득하여 다음 해에 브람스 더블 콘체르토 (이중 협주곡)을 녹음하기도 했는데, 이 곡은 역사상 그 어떤 연주자도 푸르니에 만큼 완벽하게 연주해낼 수 없다는 평을 받을 정도로 그의 대표적인 레퍼토리였으며, 남동생 장과 (남동생과 함께 연주하여 녹음한 1945년 레코딩은 공개되지 않았다.) 시게티 그리고 프란체스카티 등과 함께 연주하기도 했었다. 당시엔 비교적 저평가 되었던 이태리 지휘자 알체오 갈리에라(Alceo Galliera)와 콜럼비아 레이블에서 함께 녹음한 브람스 이중 협주곡 앨범은 오이스트라흐가 생전에 가장 사랑하던 앨범으로 알려져 있는데, 실제 그가 숨을 거두던 순간에도 이 앨범을 듣고 있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푸르니에가 콜롬비아을 위해 함께한 3년간의 기간 동안 남긴 레코딩에는 슈만 협주곡이 있는데, 푸르니에의 연주는 수많은 슈만 콘체스토 연주 중 단연 가장 위대한 연주로 정평이 나있다. 필자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차이코프스키 작품과 함께 LP 앨범에 실린 이 연주를 듣고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푸르니에의 너무나도 자연스러우며 당당한 솔로 연주에 넋이 나갔던 순간을 기억한다. 어떤 이유에서 인지, 프랑스 출신 연주자들은 슈만의 작품들을 연주할 때 더 빛을 바라는 듯 한데, 이 작품에서도 역시 푸르니에가 읽어내는 곡의 구조적 견고함과 오직 그만이 표현해 낼 수 있는 아름다운 연주 기교는 그 어느 때보다 빛나고 있다.
C Tully Potter, 2010
번역 이가영
■ 본 앨범은 2010년 EMI Classics에서 아이콘(Icon) 시리즈로 발매한 피에르 푸르니에 앨범 (62953924, 7CD, 수입발매)을 재구성한 음반이며, 《아이콘 - 피에르 푸르니에》 앨범에 수록된 툴리 포터의 해설을 발췌한 것임을 밝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