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PA And The United Nations Of S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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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브(The Verve)의 프론트맨이었던 리처드 애쉬크로프트,
2010년 새로이 선보이는 밴드 RPA & The United Nations Of Sound
(* ‘RPA’는 리처드 애쉬크로프트의 풀 네임, 즉 ‘Richard Paul Ashcroft’의 이니셜)
제이지(Jay-Z)와 카니예 웨스트(Kanye West)의 프로듀서 No. I. D.와 함께 작업한 하이브리드 ‘사운드의 국제 연합’ 히트 싱글 'Are You Ready' & 'Born Again' 등 총 12곡 수록.
리처드 애쉬크로프트는 장르의 벽을 넘어 풍성한 편곡을 내세우며 또 한 번의 전성기를 재현하고자 한다. 그가 마련한 신보 [United Nations Of Sound]는 버브나 리처드 애쉬크로프트의 과거를 몰랐던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어필할 수 있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이 앨범의 히트 싱글 ‘Are You Ready’와 ‘Born Again’ 외에도, 놀랍게도 ‘Let My Soul Rest’는 미카(Mika)를 ‘Life Can Be So Beautiful’은 제임스 모리슨(James Morrison)을 떠올리게 하며, ‘She Brings Me The Music’은 딱 리처드의 사운드이다. 한 마디로 리처드의 하이브리드는 놀라우면서도 새롭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분이 좋다. 탈(脫)버브와 홀로서기는 성공적!
RPA & The United Nations Of Sound
<United Nations Of Sound>
1990년대 영국 록 음악을 이야기할 때 빼먹어서는 안 될 이름들이 몇몇 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고유명사야 블러(Blur)와 오아시스(Oasis)겠지만 그에 필적할 만한 그룹을 더 꼽는다면 거기엔 그룹 더 버브(The Verve)도 있을 것이다. 보컬리스트 리처드 애쉬크로프트(Richard Ashcroft)를 중심으로 1990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이 5인조 그룹은 결합과 해체를 거듭하면서도 영국 록 음악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겼다. 화려하면서도 매끈한 자태를 뽐내던 다수의 브릿팝 밴드 사이에서 매력적인 사이키델릭 록을 주무기로 삼은 버브의 음악은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들이 남긴 두 장의 명반, <A Northern Soul>(1995)과 <The Urban Hymns>(1997)는 십 년 이상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필수 청취 앨범’으로 추앙받고 있다. 2003년 NME가 발표한 역대 최고의 앨범 리스트 가운데 <A Northern Soul>이 28위를 기록한 데 이어, 2006년 Q 매거진이 선정한 역대 최고의 앨범 리스트에서 <Urban Hymns>가 16위에 오른 것을 보면 이 그룹이 만든 음악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를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Urban Hymns>가 기록한 높은 판매고는 버브가 지닌 대중성을 대변하기도 했다.
한 마디로 버브는 영리한 음악 집단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색깔을 고집하면서도 대중의 감성을 사로잡을 줄 아는 총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밴드의 브레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리처드 애쉬크로프트가 있었다. 버브는 곧 리처드였고 리처드는 곧 버브였다. 그의 독특한 세계관과 음악에 대한 열정은 ‘매드 리처드(mad Richard)’라는 불명예마저 반어법으로 희석시키기에 충분했다. 오죽하면 오아시스(Oasis)를 이끌었던 노엘 갤러거(Noel Gallagher)가 그에게 ‘Cast No Shadow’라는 명곡을 헌정했겠는가. 두 사람의 개인적 친분을 떠나 이 곡은 리처드의 능력을 다시금 확인시켜주는 상징적인 작품이었다. 물론 리처드에게 하트 세례를 날린 건 노엘뿐만이 아니었다. 영국산 대형 그룹 콜드플레이(Coldplay)의 프론트맨 크리스 마틴(Chris Martin) 역시 리처드를 향해 진심어린 존경을 표하곤 했다. 남들이 혹평을 마다하지 않았던 리처드의 두 번째 솔로 작품 <Human Conditions>(2002)에 애정을 표시했던 것도, 2005년 라이브 8(Live 8) 콘서트에서 리처드를 무대 위로 초대하여 그와 함께 버브의 ‘Bitter Sweet Symphony’를 열창했던 것도 다름 아닌 크리스였다. 당시 그는 “세계 최고의 가수가 부른 역사상 최고의 곡”이라며 과찬의 소개말을 남기기까지 했다. 이렇게 두 거물 밴드의 리더가 리처드를 숭앙하는 모습을 보면, 리처드가 범인(凡人)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2000년대는 리처드의 시대가 아니었다. 1999년 버브는 리처드와 닉 맥케이브(Nick McCabe) 사이에 균열이 생기면서 해체 수순을 밟았고, 2000년부터 시작된 리처드의 솔로 활동은 버브가 일구어냈던 성과를 경신하는 데 실패했다. 리처드가 지금까지 낸 세 장의 솔로 앨범들이 모두 영국 차트 3위 안에 진입한 것과 동시에 유럽 전역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음에도, 그 파급력은 과거에 비해 약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아마 황홀한 사이키델리아로 무장한 버브와는 다르게 리처드가 대중적인 노선을 취하면서 과거의 색깔을 누그러뜨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이에 ‘A Song For The Lovers’(2000)나 ‘Break The Night With Colour’(2006) 같은 히트곡도 배출됐지만 버브와 매드 리처드의 추종자들이 쉽게 만족할 리 없었다.
결국 리처드는 솔로 활동에서 갈증을 느꼈던 것일까? 2007년이 되자 리처드는 사이먼 통(Simon Tong)을 제외한 나머지 버브 멤버들과 함께 다시 한 번 팀을 결성했다. 팀 통산 네 번째 앨범으로 기록된 <Forth>(2008)는 버브를 향한 대중과 평단의 사랑을 재확인시켰다. 그러나 2009년이 기다린 것은 버브의 세 번째 해산이었고, 리처드는 또 다시 혼자 남을 수밖에 없었다. 팀 와해와 독립선언은 마치 운명의 꼬리표처럼 리처드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누구나 휴식을 고려할 수도 있겠지만 리처드는 달랐다. 예전처럼 솔로 활동을 재개할 것이라는 일부의 예상과는 다르게,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밴드를 만들었다. 팀 이름은 버브와 거리가 먼 ‘RPA & The United Nations Of Sound.’ 여기서 RPA는 리처드의 풀 네임, 즉 ‘Richard Paul Ashcroft’의 이니셜을 가리킨다. 리처드가 밴드의 핵심 인물임이 팀 이름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올해 그가 신보 발매 소식과 함께 발표한 투어 멤버로는 스티브 와이어맨(Steve Wyreman, 기타), 데릭 라이트(Derrick Wright, 베이스), 리코 페트릴로(Rico Petrillo, 키보드), 큐 잭슨(Qyu Jackson, 드럼)이 있다. 생소한 이름만큼 멤버들의 경력이 그렇게 화려한 편은 아니다.
하지만 새로운 밴드 구성원들보다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앨범의 작업 과정과 그 결과물이다. 리처드는 신보 작업을 위해 미국 뉴욕으로 건너갔고, 여기서 프로듀서 노 아이디(No. I. D.)를 만났다. 노 아이디는 제이지(Jay-Z)와 카니예 웨스트(Kanye West)의 음악을 프로듀스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린, 현재 꽤 잘 나가는 힙합 프로듀서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힙합 플레이어에게 록커 리처드가 다가갔던 이유는 무엇일까? 리처드는 노 아이디가 프로듀스를 맡았던 제이지의 ‘D. O. A(Death Of Auto-Tune)’에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물론 프로듀서들이 판매고만 고려해서 앨범 수준이 낮아졌다는 그의 발언에 적극 공감했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리처드는 장르의 벽을 타파하고 싶어 했다. 새로운 팀과 새로운 앨범을 통해 그가 준비한 것은 음악 그대로의 음악이었다. 모타운 레코드가 낳은 여러 편의 명작에서 중책을 맡은 바 있는 레지 도지어(Reggie Dozier)와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의 <Off The Wall>(1979)에서 한 축을 담당하기도 했던 벤자민 라이트(Benjamin Wright)가 각각 엔지니어링과 현악 편곡을 맡은 것도 리처드의 굳은 목표의식에서 비롯된 셈이다. 결국 이 앨범의 숙제는 장르 간의 하이브리드였다. 이러고 보니 팀 이름이 ‘사운드의 국제 연합’으로 결정된 이유를 알 것 같다.
이미 버브나 리처드의 음악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번에 리처드가 들고 나온 신보 <United Nations Of Sound>에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여기에 담긴 음악은 버브의 음악과 상당히 동떨어져 있는데다가 그나마 대중적인 것으로 평가받았던 과거 리처드의 음악과도 느낌이 많이 다르다. 지난 1월에 발표된 신보의 첫 번째 프로모션 싱글이자 앨범의 첫 곡인 ‘Are You Ready’부터가 예상을 빗나간다. 이 곡부터 마지막 곡 ‘Let My Soul Rest’에 이르기까지 앨범 속에는 팝적인 느낌, 다시 말해 누구나 마음 놓고 즐길 수 있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 인트로만 들으면 리처드 대신에 미카(Mika)가 등장한다 해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 게다가 ‘Life Can Be So Beautiful’은 제임스 모리슨(James Morrison)의 히트곡 ‘You Give Me Something’을 연상시킨다. 그나마 차분한 느낌의 ‘She Brings Me The Music’만이 리처드의 과거를 환기시킬 뿐이다.
이러한 변화의 상당부분은 스트링과 비트에서 기인한다. 리처드는 거의 매 순간 현악 사운드를 중용하면서 음악에 거대한 활기를 불어넣고, 프로그래밍 비트를 적극 활용하면서 음악에 가벼운 느낌을 살려낸다. 벤자민 라이트와 노 아이디의 공로 역시 이 부분에서 극대화된다. 또한 리처드의 목소리는 풍부한 감정선을 그리며 음악과 제대로 어우러진다. ‘Born Again’과 ‘How Deep Is Your Man’ 사이에 드러나는 감성의 편차도 그의 가창을 통해 가볍게 조절된다. 신보를 담백한 소울(soul) 성찬이라고 표현해도 별 무리가 없을 정도다.
리처드는 자신의 창작욕을 발현하기 위해 ‘RPA & The United Nations Of Sound’라는 또 하나의 그릇을 마련했다. 그리고 장르의 벽을 넘어 풍성한 편곡을 내세우며 또 한 번의 전성기를 재현하고자 한다. 다행히도 그가 마련한 신보 <United Nations Of Sound>는 버브나 리처드의 과거를 몰랐던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어필할 수 있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더 많은 대중을 만나고자 하는 리처드의 모험은 현악과 프로그래밍 비트를 통해 기분 좋은 활기로 귀결되고 있다. 한 마디로 리처드의 하이브리드는 놀라우면서도 새롭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분이 좋다. 이만하면 탈(脫) 버브와 홀로서기는 성공적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RPA 혹은 매드 리처드가 시작한 모험은 결코 일회성으로 끝날 것 같지가 않다.
글: 김두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