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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수봉 - 10집 / 꽃
25년 뮤지션의 삶과 음악적 성찰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10번째 음반 '꽃'을 들고 심수봉은 2005년 1월 15일 우리곁으로 한걸음 다가왔다. 쓸쓸하게 밀려왔다가 외로움만 남겨 놓은채 사라져버리는, 가슴속에 깊은 상흔을 남기는, 어느덧 내면으로 타고 들어와 발끝을 저리는 그 연륜의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참으로 시대의 가객이라는 생각을 지울수 없다. 지난 연말 4000여 객석을 다 채운 그녀의 콘서트를 시작으로 10번째 음반의 성공적 신호탄을 쏘아올린 심수봉은 타이틀곡 '개여울'을 비롯 11트랙의 음악으로 자신의 음반을 촘촘히 꾸며놓았다.

- 길고 긴 여정, 그 뒷안길에서 돌아온 뮤지션 심수봉

아이보리빛 그랜드피아노 앞에는 하늘색 원피스를 곱게 입은 스물셋의 그녀가 앉아 있었다. 관현악단과 멋진 화음을 만들어내자 사람들의 눈과 귀는 그녀를 향했다. 78년 MBC대학가요제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진 '그때 그 사람'은 심사위원들에게 너무 전문가의 느낌이 난다는 평가를 받아 입상하지 못했으나 시대를 가로지르는 불후의 명곡으로 남았다.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무궁화' '미워요' '비나리 '백만송이 장미' '사랑밖엔 난 몰라' 등 주옥같은 곡들로 우리에게 사랑을 받은 심수봉(본명 심민경)은 미군 무대에서 드러머로 활동한 특별한 이력의 뮤지션이었다. 피아노 연주 실력도 남달랐던 그녀는 리듬과 멜로디 모두에 능숙해 자신의 곡을 직접 작사 작곡했으니 우리나라 가요사에 몇 안 되는 여성 싱어송라이터로 손꼽히는 걸출한 뮤지션이었다.
79년 '그때 그 사람'이 담긴 데뷔 음반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양대 방송사의 신인가수상과 10대 가수상을 거머쥐었지만 10월26일 대통령 시해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무려 5년 동안 방송출연금지를 당했다. 창작의 열정으로 나날을 보내야 했던 한 뮤지션의 행보를 가로막은 5년은 고스란히 우리 대중가요를 사랑한 가요팬들의 손실이었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애석함은 이루 표현할 길이 없다. 심수봉은 83년 KBS라디오 드라마 '순자의 가을' 주제곡을 만들었으나 영부인의 이름과 같다는 이유로 '올 가을엔 사랑할 거야'로 제목을 바꿔 방미가 노래하는 웃지 못할 사연을 겪기도 했다.
25년이 흐른 지금에도 심수봉은 꺼지지 않는 불빛처럼 대중들의 가슴에 고스란이 잔재해있는 우리시대의 뮤지션으로 10번째의 음반을 내놓으며 생명력을 이어오고 있다.

- 저력, 끊임없는 열정을 말한다

지난해 12월 28, 29일 양일간 성균관대학교 새천년홀에는 보기 드문 광경이 연출되었다.
5년만에 열린 심수봉 콘서트 '어느 멋진 날'은 4회 공연이 전석 매진을 기록하고 보조석까지 동원해야만 했던 화제의 공연이었다. 가수가 5년만의 공백을 깨고 새로운 음반이 나오기 전에 가진 공연에서 객석 4,000석을 채우는 일이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닐진대 그야말로 심수봉은 시대를 가로지르는 뮤지션이자 우리 시대의 가객인 모양이다.
공연장 로비는 40대에서 60대에 이르는 중장년층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활보하는 풍경과 다정하게 팔장을 낀 우리시대의 부모들이 아스라히 지난 세월에 젖은 모습은 정겨움을 더했다. 1,20대 주류인 가요공연시장에서 보기드문, 퍽 감동스런 장면이 공연전부터 연출된 것이다. 25년전의 일을 추억하며 공연장 로비를 걷고 있는 사람들은 20대의 추억을 보듬으며 그리움과 덧없음이 교차하는 만감에 젖어 있었던 것이다. 음악 하나만으로 시간을 거꾸로 돌려놓을 수 있는 저력과 열정의 가객, 심수봉은 그야말로 대가임을 부정할 수 없는 뮤지션이다.

- 연륜과 현대적 감각의 어울림, 그 새로움

지난 아홉장의 음반에서 심수봉은 그 누구와도 음악적 타협을 하지 않은 채, 모두 혼자서 음반 작업을 해온 것으로 유명한 뮤지션이다. 그 험난했던 음악적 역경의 세월은 한올 한올 연륜으로 뭉쳐졌다. 그런 그녀가 이번 음반에서는 국내 최고의 프로듀서이자 히트제조기 박근태와 손을 잡고 보컬 디렉터를 맡긴 것이다. 연륜은 고집이 아니라 자신을 한없이 풀어내고 새로운 것과의 타협을 모색하는 심수봉의 삶의 자세와 연관된다. 음악적 내공은 그렇게 새로운 시대의 기류와 접목되어 어우러짐으로써 또 다른 심수봉의 세계를 역력하게 보여준다. 이번 10집의 변신은 바로 심수봉의 연륜이 만들어낸 조화다.

- 촘촘히 엮인 수록곡의 면면들

11곡의 노래가 새순 돋듯 제각기 생명력이 솟구친다. 촘촘하게 엮인 곡들을 디스크에 올려놓음으로써 이내 심수봉만의 독톡한 음악 향기가 자욱하다. 타이틀곡이자 첫 트랙에 수록된 '개여울'(작시:김소월/작곡:심수봉)은 김소월의 시를 노래로 옮겨놓았다. 그 음색을 흉내 내는 것이 차라리 무모한 짓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심수봉이 읊조리는 고혹한 소리에 답이 담겨있다. 소리의 내공을 직감하듯 심수봉의 공명은 가슴 깊숙히 치고 들어와 산산히 부서진다는 표현이 결코 과장됨이 없다. 뉴욕에서 2년여 유학생활 끝에 음악적 성찰과 사랑에 관한 명상을 담아낸 '이별없는 사랑'(작사:심수봉/작곡:심수봉) 역시 빛나는 가사와 더불어 보컬의 원숙함에 무릎을 내리칠만한 곡이다.
'백만송이 장미'(작사:심수봉/작곡:심수봉)는 자신의 곡을 새로운 리듬의 옷을 입혀 그 신선함을 더욱 극적으로 표현했고, 이탈리아 칸쵸네 장르인 '사랑이 시로 변할때'(작사:심수봉/작곡:Jonh Thomas)는 직접 번안해서 불렀다. 수봉의 대표곡이자 국민가요로 사랑을 받은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작사:심수봉/작곡:심수봉) '사랑밖엔 난 몰라'(작사:심수봉/작곡:심수봉) 역시 새로운 감각의 편곡으로 그 맛은 더욱 감칠만하다. 조용필의 히트곡 '그 겨울의 찻집'(작사:양인자/작곡:김희갑) 또한 심수봉만을 생각하게 만드는 특유의 향기가 가시지 않는다.
오페라 사랑의 묘약 아리아 '남몰래 흐르는 눈물'(작사:심수봉/작곡:Donizeti Gaetano)과 밝고 경쾌한 스윙 리듬의 'Love of Tonight'(작사:심수봉/작곡:심수봉), 국악과 재즈를 접목해 동서양의 오묘한 만남을 드라마 틱하게 표현한 '남자의 나라'(작사:심수봉/작곡:심수봉)는 심수봉의 음악적 지평을 새롭게 열고 있음을 알리는 지표로 손색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