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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 - Blue Note The Collector’s Edition (LP Sleeve Box Set) [초도한정 블루노트 고급 티셔츠 증정]

블루노트 창립 70주년 기념 특별 발매!
[ Blue Note - The Collector's Edition 25cds]

재즈 명가 블루 노트 70년의 발자취를 한자리에서 대표 명반으로 만나다!
이제껏 만날 수 없었던 블루노트 초유의 가격으로 만나는 박스 세트!
블루노트 창사 70주년을 기념하여 세계 최초 한국에서만 유일하게 발매되는 한정발매 박스 세트!
캐논볼 애덜리의 [Somethin' Else]를 비롯하여 루 도널드슨의 [Blues Walk]까지 블루노트를 대표하는
인기 명반 24 타이틀을 가장 저렴한 가격으로 한번에 모두 셀렉션 할 수 있는 단 한번의 기회!
* 블루노트 역사상 가장 유명하며 많이 판매되는 24 타이틀 엄선
* LP의 고유한 느낌이 묻어나는 LP Sleeve 형태로 제작
* Limited Edion, Available Korea Only

BLUE NOTE - 1939-2009 : 70 Years of the Finest in Jazz
블루 노트 70년의 발자취

"예술작품을 상품으로 만드는 행위는 수지가 맞지 않을 수 있는, 때로 자기모순적인 일이다. 인상적인 그림과 빼어난 해설문, 그리고 음악계에 독특한 족적을 남길 내용물을 갖추고 있더라도 상업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지 확언하기는 매우 힘들다. 하지만 걸작들을 탄생시키는데 관여해온 사람들이 종종 존재했으며, 이들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음악인과 대중 사이에 자리한 매개자로서 독보적인 역할을 수행해 왔다. 블루 노트 레코드사를 설립한 알프레드 라이온과 (그의 파트너인)프랜시스 울프는 어떠한가. 그들은 수익의 창출은 물론이고, 일에 대한 명료한 의식과 타협 없는 성과물의 제작이 가능함을 그 누구보다 확고하게 입증했다."

생전의 재즈비평가 레너드 페더는 1971년 위와 같은 글을 남겼다. 그리고 나는 매개자라는 표현에 이런 말을 덧붙이고 싶다―그들은 매우 인상적인 기폭제의 임무를 수행했으며 20세기 중반 최고의 재즈가 남긴 산물 중 상당 부분을 테이프에 옮겨 보존하는 역할까지 해냈다. 녹음을 한다는 것은 위대한 재즈가 선보인 표현력과 감정, 인터플레이, 개성, 그리고 무의식적인 작곡 행위까지 포착해낼 수 있는 유일한 매체가 아니던가.

블루 노트 레이블을 출범시킨 1939년부터 알프레드 라이온과 프랜시스 울프는 스스로 좋아하고 신뢰하는, 그리고 그들의 감성을 자극한 음악을 녹음했다. 앨버트 애몬즈의 부기우기부터 탁월한 음악인 시드니 베쉐가 연주한 전통적인 재즈에 이르기까지, 블루 노트는 진솔한 감정과 인공미를 배제한, 순수한 재즈의 단면을 보여주었다. 그러던 1947년, 테너 색소포니스트 아이크 퀘벡은 그즈음 재즈계에서 논란을 일으키며 새롭게 부흥하던 비밥의 세계로 알프레드 라이온과 프랜시스 울프를 이끌었다. 두 사람은 발 빠른 탐구에 돌입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셀로니어스 몽크, 아트 블래키, 제임스 무디, 팻츠 나바로 등 여러 연주자들의 초창기 녹음을 완성할 수 있었다. 다른 레이블에도 등장한 이 연주자들의 많은 세션을 비롯해, 버드 파월과 마일즈 데이비스가 남긴 녹음은 그 중에서도 빛을 발한다.

꾸준히 범상치 않은 행보를 드러내던 블루 노트 레이블은 1955년에 창립 16주년을 맞았지만, 변화무쌍한 비즈니스계의 만만찮은 재정적 현실에 부딪혀 고전을 면치 못했다. 따지고 보면 어떤 예술에서든 고결하고 혁신적인 지향이 금전적인 면에서 즉각적인 회수를 낳기는 힘든 일이다. 블루 노트의 작품들은 비평가들 사이에서 더없이 훌륭한 것으로 칭송 받았지만 질적인 성과에 비해 판매는 이를 따라주지 못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바로 그 해, 이른바 블루 노트 사운드라 불리는 것이 비로소 자리를 잡았고 기대하지 못했던 재즈 팬들의 전폭적인 지지로 이어졌다. 블루 노트 사운드는 단순히 음악 스타일을 뜻하지 않는다. 이는 실제보다 다분히 과장된 사운드를 담고 있으며, 음악인들에게 내재된 깊은 심미안 그리고 철저하게 계획된 세션과 리허설의 과정을 모두 아우른다. 이렇게 만들어진 최종 결과물은 복합적인 정밀함이 수반된 날것의 감정을 용해해 냈다.

이 때부터 약 12년 동안 블루 노트는 재즈계 최첨단의 흐름을 찾아 나섰고 이를 녹음으로 담아냈다. 그리고 그 어떤 다른 회사보다 조심스럽고 세심하게 일을 진행해 갔다. 하나의 작품을 위한 작은 아이디어에서부터 독특한 디자인과 사진으로 만들어진 앨범이 최종적으로 음반 매장에 내걸릴 때까지, 알프레드 라이온과 프랜시스 울프는 레코드 업계에서 다른 이들과 비견될 수 없는 완벽주의를 추구했으며 실제로 이를 성취했다. 살아 있는 열정을 품은 채 당대의 재즈가 보여준 예술성의 발전상을 모두 포착했고, 그 중 최고의 것들을 블루 노트의 작품 속에 담아냈다.

블루 노트 레이블이 하드 밥 사운드를 일구어낸 1955년과 존 콜트레인이 세상을 떠나고 마일즈 데이비스가 퓨전의 물결로 선회하기 시작한 1967년 사이, 재즈계는 그야말로 급변하고 있었다. 뛰어난 음악인들이 매우 방대한 저변을 형성한 채 부단히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재즈의 영역을 확대하던 시기는 그 이전, 혹은 그 이후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이 시기에는 놀랍도록 많은 양의 재즈가 쉼 없이 녹음됐다. 그러나 알프레드 라이온과 프랜시스 울프처럼 일정 수준을 꾸준하게 유지한 이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오늘날까지 음악인들은 세대를 거듭하면서도 블루 노트가 녹음한 걸작들의 유산을 자신들이 가장 크게 영향 받은 첫 번째 교육기관으로 여기고 있다. 블루 노트 레이블은 수많은 음악인들의 고전적인 앨범들을 제작했다. 존 콜트레인, 소니 롤린스, 쟈니 그리핀, 아트 블래키, 호레이스 실버, 지미 스미스, 캐논볼 애덜리, 소니 클락, 덱스터 고든, 리 모건, 행크 모블리, 허비 핸콕, 웨인 쇼터, 조 헨더슨, 루 도날드슨, 그랜트 그린, 케니 버렐 등이 그들이다.

알프레드 라이온이 은퇴를 결심한 1967년, 프랜시스 울프가 그 뒤를 이어 제작에 필요한 모든 업무를 맡기 시작했다. 이즈음 블루 노트 레이블은 리버티 레코드사의 소유가 돼 있었다. 그리고 이 때부터 프랜시스 울프가 세상을 떠난 1971년까지 재즈계의 상황은 매우 힘들었다. 새롭게 일을 맡은 이는 조지 버틀러. 그는 블루 노트 레이블을 한결 상업적인 방향으로 이끌었다. 도널드 버드와 바비 험프리의 앨범을 제작한 래리 미젤과 폰스 미젤 형제, 그리고 얼 클루와 노엘 포인터의 앨범을 제작한 데이비드 그루신과 래리 로젠 같은 프로듀서들이 바로 이 시기에 조지 버틀러와 함께 했다. 그러나 1970년대 말에 접어들면서 레코드 업계는 극심한 침체기에 접어들었고, 이 베스트셀러들조차 블루 노트를 구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레이블은 1981년, 제작 중단에 들어가게 됐다.

1984년 여름, EMI 레코드사는 블루 노트 레이블의 완벽한 부활을 위해 브루스 런드발을 고용했다. 그가 처음으로 계약서를 내민 음악인으로는 바비 맥퍼린, 덱스터 고든, 케니 버렐, 스탠리 터렌틴, 미셸 패트루치아니, 스탠리 조던 등이 있었다. 현을 두드려 멜로디와 코드, 그리고 베이스 라인까지 동시에 연주하는 놀라운 테크닉의 젊은 기타리스트 스탠리 조던은 기타를 마치 피아노처럼 연출해내는 인물이었다. 스탠리 조던과 바비 맥퍼린의 앨범들은 대중적인 히트를 기록하며 새롭게 재건된 블루 노트를 도왔다.

이 때부터 블루 노트는, 뛰어난 잠재력을 지녔지만 미처 이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던 중요한 음악인들의 앨범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 존 스코필드와 카산드라 윌슨, 그리고 터렌스 블랜차드는 블루 노트와 계약하기 전 이미 다른 여러 레이블에서 앨범을 발표했었다. 하지만 이들의 창조적인 영혼을 진정 꽃피우고 탁월한 작품으로 제작해낸 것은 바로 블루 노트 레이블이었다. 그리고 블루 노트는 뛰어난 재능의 신인들을 발굴하는 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엘리아니 엘리아스, 조 로바노, 곤잘로 루발카바, 그리고 재키 테라슨처럼 많은 이들에게 칭송 받던 음악인은 물론이고, 미래의 스타로 얘기되던 제이슨 모란과 로버트 글래스퍼 등이 함께하게 됐다.

1980년대 말, 런던의 클럽계는 블루 노트의 재즈를 댄스 음악으로 탈바꿈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랜트 그린과 루 도날드슨, 그리고 루벤 윌슨 등 여러 블루 노트 소속 연주자들의 곡을 샘플링했고, 이는 힙합 음악인들에게 일반적인 경향이 됐다. 그러나 Us3처럼 힙합과 재즈를 성공적이고 빈틈없이 융합해낸 그룹은 존재하지 않았다. 런던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Us3는 제프 윌킨슨에 의해 결성됐으며, 호레이스 팔란이 블루 노트에서 발표한 트리오 앨범의 타이틀을 따서 그룹의 이름을 지었다. 허비 핸콕 원작의 'Canteloupe Island' 중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부분을 샘플링하여 만든 'Cantaloop'로 Us3는 블루 노트에게 대중적인 히트곡을 남겼을 뿐 아니라 재즈와 랩의 퓨전에 있어 하나의 표준을 제시했다. 이러한 흐름의 한 편에서 등장한 메데스키 마틴 앤 우드는 잼 세션 연주를 바탕으로 한 밴드 중에서도 혁신적인 경우로 얘기된다.

블루 노트는 노라 존스라는 이름의, 피아노를 연주하는 젊은 싱어-송라이터와 계약을 맺었다. 2001년의 일이었다. 그즈음 그녀는 소호의 식당에서 재즈 연주를 벌이고 있었으며 컨트리 밴드와 클럽 무대에 서기도 했다. 어쨌든 그녀의 첫 앨범은 레코드업계 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 중 하나로 남게 됐다. 이 앨범은 노라 존스의 인생을 극적으로 변화시켰을 뿐 아니라 블루 노트로 하여금 보다 고전적인 음악인들과 계약을 맺게 하는 전환점을 마련했다. 알 그린과 아니타 베이커가 대표적이며, 블루 노트가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재능 어린 신인 에이모스 리 등이 이 범주에 포함된다.

2009년, 블루 노트는 창립 70주년을 맞이한다. 그리고 현재 블루 노트의 실권을 쥐고 있는 이들이 그 사실에 대해 특별히 뭔가 말하지 않아도, 알프레드 라이온과 프랜시스 울프가 창조했던 높은 수준의 유산은 계속해서 번영하고 진화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마이클 쿠스쿠나(Michael Cuscuna) / 김현준 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