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현 - 피리 태평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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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현의 피리 태평소
박경현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가장 빼어난 중견 피리 연주자 가운데 한명이다. 그는 ‘서용석류 피리산조’와 ‘박범훈류 피리산조’ 를 고루 잘 연주한다.‘박범훈류 피리산조’에 경기시나위의 나긋나긋하면서도 우아한 풍류가 담겨져 있다면, ‘서용석류 피리산조’에는 남도음악의 격정적 슬픔이 농익게 담겨있다. 박경현은 민속음악의 서정성을 가장 민속음악답게 표현해내는 연주자이다. 그런가 하면 피리를 위하여 새롭게 작곡된 음악의 해석력도 탁월하여, 그가 지닌 음악세계의 폭이 얼마큼이나 넓은지 새삼스레 확인할 수 있다.
피리는 자그마하면서 음역이 좁은, 남성적인 무뚝뚝함이 드러나는 악기다. 피리를 포함한 민속악기들은 악기에 음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연주자의 머릿속에 음악이 있다. 서양의 관악기는 부는 대로 음정이 나오는데 반해, 우리 악기들은 악기마다 음정이 달라서 자신의 악기로 정해진 음정을 찾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피리는 겹리드로 되어있어서 소리내기가 까다로우며, 음정을 잡기 어렵고, 호흡이 짧아질 수밖에 없다. 피리연주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기교로는 ‘혀치기’를 들 수 있는데, 이 기량을 어떤 방식으로 구사하느냐가 그 연주자의 실력을 가늠하는 바로메타가 된다. 박경현은 혀치기를 가장 능숙하게 구가하는 연주자이다. 그리고 가장 까다롭다는 상청을 내는 기교에서 특히 멋진 음색을 구가하여 자신의 장기로 삼고 있다.
박경현의 첫 곡은 ‘서용석류 피리산조’ 이다. 이는 대금의 명인 서용석 선생이 구음으로 가락을 짜서 완성한 것으로, 계면조와 우조, 그리고 경드름의 배합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매력적인 산조이다. 서용석 선생은 대금과 아쟁의 명인이면서 빼어난 작곡가이다. 남도음악의 진수인 계면조 분위기를 가장 멋지게 표출하고 있으면서도, 우조와 경기음악의 특징을 갖추고 있는 경드름을 적절하게 배합하여 다채로운 악상을 구성하고 있다. ‘서용석류 피리산조’ 는 진양조→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장단으로 구성되어 흘러간다. 진양조와 중모리는 주로 우조와 계면조가 반복적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빠른 장단인 중중모리와 자진모리에는 우조→계면조→경드름→계면조의 구조를 보이고 있다. 또한 각 장단마다 프레이징이 명확하며, 특히 계면조 단락에서 남도제 피리산조의 매력을 한껏 살려내고 있다. 그리고 중중모리와 자진모리에 경드름이 있어서, 피리라는 악기가 경기굿 음악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두 번째는 ‘박범훈류 피리산조’이다. 박범훈 선생은 작곡가 지휘를 하면서 뛰어난 피리잽이 이다. 지영희 선생의 가락을 토대로 박범훈 선생의 가락을 첨가하여, 피리의 기교와 성음을 두루 갖춘 산조이다. 이를 박경현이 해석 하였다.
다음으로는 태평소 독주로 들려주는 ‘경기염불에서 남도시나위까지’다. 대체로 피리 연주자는 태평소도 잘 불지만, 특히 박경현은 빼어난 태평소 연주자이기도 한다. 태평소는 경기굿이나 남도굿에서도 중요한 기능을 하는 관악기인데, 음정이 매우 높고 음량 또한 커서 풍물굿에서 선도 역할을 힘차게 해낸다. 태평소 가락에도 경기무 음악에 사용된 가락과 남도굿에서 사용되는 시나위 가락이 있다. 경기제는 염불→반염불→굿거리→타령→자진타령→능게→자진모리→휘모리의 순서로 이어지는데, 사물연주의 사이사이에 태평소가 끼어들면서 상쇠나 북과 장구 등 타악기가 연주될 때 그 사이를 채워주는 기능을 한다. 그리고 남도시나위 가락은 굿거리→자진모리→엇모리→동살풀이→휘모리로 짜여있는데, 서울시 문화재인 박종선 명인이 보유하고 있는 것을 선보이게 된다.
박경현의 피리는 아주 힘차면서 도전적이다. 계면조와 우조, 그리고 경기음악의 특징이 그득한 산조를 장단에 꼭 맞게 연주하여, 산조의 매력을 잘 보여주었다. 박경현의 피리 성음에는 세월이 주는 무게가 실려있다. 치열하면서도 농익은 느낌, 장단을 타고 농락하는 기량, 혀치기에서 느껴지는 빼어난 음악성, 농음에서의 세련됨, 철저한 음악적 분석, 이런 특징들이 박경현의 피리에 담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