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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광 스님 - 구름 나그네 / 운문사 진광스님 시낭송집

시를 사랑하고, 시처럼 사는 스님의 시낭송집은 법정 스님 오디오북에 이어 강팍해진 현대사회에 건네는 두번째 산사의 맑고 향기로운 선물이다. 강물에 척척 놓여진 징검다리 같은 배경 음악들은 <여행자의 노래> 선곡자 임의진이 골라 격조를 한층 높이고 있다. 경전을 읽듯, 또는 독경을 가만히 듣듯 항상 곁에 두고 있노라면 가슴 바닥까지 내려앉은 슬픔마다 말끔히 가시고 새날이 동틀 것이다.


덴가슴마다 고이 매만져줄, 청량 청명 청아한 목소리......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사는 우리나라 비구니 승가를 대표하는 도량이다. 진광 스님은 그곳으로 출가하여 수십 년을 정진하며, 지금은 갓 출가한 풋풋한 학승들을 지도하고 있는 선생님이다. 스님은 수업시간에 학승들을 향해, 그 맑고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시 한수 읊어주곤 한다. 길고 고운 머리카락과 옷맵시를 한껏 자랑할 나이에 삭발하고 잿빛 승복을 갈아입은 비구니 스님들, 새벽부터 밤까지 한뜻 한마음으로 불법을 구하고 있는 학승들은 물론이고, 운문사의 천년지기 소나무 숲과 산새들과 야생화들도 스님의 시낭송에 귀를 종그리곤 하였다. 자비와 위로, 그리고 격려와 굳센 의지가 스님의 목청을 타고 강물처럼 흘러드는 순간... 그 감동의 순간을 함께 하고자 좥구름 나그네좦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늘 스님의 시낭송을 다같이 이렇게 들을 수 있음은 정녕 반갑고도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곡마다 수놓아진 배경음악은, 스님과 오랜 도반 사이인 좥여행자의 노래좦 선곡자이며 남녘교회 담임 목사를 역임했던 떠돌이별 임의진이 직접 골랐다. 붓다와 예수의 제자, 종교 간의 화해와 우정이 도타운 평화로 꽃 피는 가슴 찡한 장면이다. 각박한 현대 사회는 날이 갈수록 시와 시집, 시인과 멀어져 가고 있다. 시(詩)는 한자풀이대로, 사원에서(寺) 듣는 맑고 깊은 말씀(言)이다. 청량하고 청명하며 청아한 진리의 말씀이 바로 시다.


운문사의 법도대로, 이제는 어떤 사찰에서도 찾아 볼 길 없는 전통적인 절집살이는 진광 스님의 목청을 더더욱 맑고 순수하게 이끌었다. 그리하여 그분 목소리를 듣노라면, 문명의 찌든 때가 한 꺼풀 벗겨지는 것 같고, 고단한 인생마다 적지 않은 위로와 용기를 얻게 될 것이리라.
보통들 시낭송에서 거슬리는 감정의 과잉은 절제와 관조로 바뀌어 편안하고, 버성겨서 따로 노는 배경음악이 아니라 야무지고도 넉넉한 받침대와 기둥들, 아늑한 지붕이 되어 낭송하는 시마다 각별히 덮어 주고 있다.


이문재, 나태주, 임의진, 곽재구, 박노해, 임길택, 김선우, 강제윤 시인을 비롯 음유시인 정태춘에서 J. 메스필드, 헤르만 헤세까지 아우르는 또박또박한 시낭송과 함께 낭송 없이 곡만 흐르는 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모두와 친구 되고자 궁을 박차고 저잣거리로 나오셨 듯, 하나의 가족 울타리에서 출가하여 여럿인 세계 가족으로 넓어지는 입가(入家)의 우정을 노래하는 것만 같다.


이 시낭송 모음집을 선물하는 그대야말로 내 ‘멋진 친구’, ‘멋진 도반’이라고 서로서로 고백하면 어떨까! 진광 스님의 좥구름 나그네좦는, 우리시대의 밝은 등불 법정 스님의 좥연꽃 향기를 들으면서 (김세원 낭독)좦에 이어, 두 번째 아울로스에서 펴내는 오디오북 시리즈다.


티벳 여행안내서 - 이문재

가지 않은 곳은 모두 미래다
그날 만나지 못했던 그 사람도
읽지 않은 그 책의 몇 페이지도
옛날이 아니다
시간과 공간은 떨어지지 않는다
내 지나간 미래, 티벳

인적 없는 깊은 산중에서 얼음이 얼 때
얼음은 얼음 속에서 얼음 속으로
샹그리라, 라고 발음하는 것 같다
샹그리라- 오래된 투명한 단단함이
내장하고 있는 깊은 소리
만년설의 맨 아래를 지탱하는 소리
내 오래된 미래, 샹그리라

티벳 히말라야 파미르
아무도 모르게 주문처럼 외운다
안나푸르나 칸쳉충가 시샤 팡마 초오유
화살기도 하듯이 소리 내어 중얼거린다
마음의 진동이 알파파로 바뀌고
이름붙이기 어려운 이 평지에서의 몇 년간
샹그리라, 샹그리라
내 전생들이 천산북로에 오르고 있다
저 앞에 있다
*샹그리라는 히말라야 어딘가에 있다는 이상향이다


돌계단 - 나태주

네 손을 잡고 돌계단을 오르고 있었지

돌계단 하나에 석등(石燈)이 보이고
돌계단 둘에 석탑(石塔)이 보이고
돌계단 셋에 극락전(極樂殿)이 보이고
극락전 뒤에 푸른 산이 다가서고
하늘에는 흰 구름이 돛을 달고 마악
떠나가려 하고 있었지

하늘이 보일 때
이미 돌계단은 끝이 나 있었고
내 손에 이끌려 돌계단을 오르던 너는
이미 내 옆에 없었지

훌쩍 하늘로 날아가 흰 구름이 되어버린 너!

우리는 모두 흰 구름이에요, 흰 구름
육신을 벗고 나면 이렇게 가볍게 빛나는
당신이나 저나 흰 구름일 뿐이에요
너는 하늘 속에서 나를 보며
어서 오라 손짓하며 웃고
나는 너를 따라 갈 수 없어
땅에서 울고 있었지
발을 구르며 땅에 서서 울고만 있었지


마중물 - 임의진

우리 어릴 적 작두질로 물 길어 먹을 때
마중물 이라고 있었다

한 바가지 먼저 윗구멍에 붓고
부지런히 뿜어 대면 그 물이
땅 속 깊이 마중 나가 큰물을 데불고 나왔다

마중물을 넣고 얼마간 뿜다 보면
낭창하게 손에 느껴지는 물의 무게가 오졌다

누군가 먼저 슬픔의 마중물이 되어준 사랑이
우리들 곁에 있다

누군가 먼저 슬픔의 무저갱으로 제 몸을 던져
모두를 구원한 사람이 있다

그가 먼저 굵은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기에
그가 먼저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꿋꿋이 견뎠기에


사월의 노래 - 곽재구

사월이면
등꽃이 피는 것을 기다리며
첼로 음악을 듣는다

바람은
마음의 골짜기
골짜기를 들쑤시고

구름은 하늘의
큰 꽃잎 하나로
마음의 불을 가만히 덮어주네

노래하는 새여
너의 노래가 끝난 뒤에
내 사랑의 노래를
다시 한번 불러다오

새로 돋은 나뭇잎마다
반짝이는 연둣빛 햇살처럼
찬란하고 서러운
그 노래를 불러다오


회향 - 박노해

부처가 부처인 것은
회향(廻向)했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을 크게 되돌려
세상을 바꿔냈기 때문이다

자기 시대 자기 나라
먹고 사는 민중의 생활 속으로

급변하는 인간의 마음속으로
거부할 수 없는 봄기운으로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욕망 뒤얽힌 이 시장 속에서
온몸으로 현실을 부딪치면서
관계마다 새롭게 피워내는
저 눈물 나는 꽃들 꽃들 꽃들

그대
오늘은 오늘의 연꽃을 보여다오

나뭇잎마다
반짝이는 연둣빛 햇살처럼
찬란하고 서러운
그 노래를 불러다오


완행버스 - 임길택

아버지가 손을 들어도
내가 손을 들어도
가던 길 스르르 멈추어 선다

언덕길 힘들게 오르다가도
손드는 우리들 보고는
그냥 지나치질 않는다

우리 마을 지붕들처럼
흙먼지 뒤집어쓰고 다니지만
이다음에 나도
그런 완행버스 같은 사람이
되고만 싶다

길 가기 힘든 이들 모두 태우고
언덕길 함께
오르고만 싶다


운문(雲門)에 살다 - 진광

세상을 등지고
구름문 들어서니
산마루 걸린 한 조각 흰 구름

구름문의 봄 가을 서른 번을 지났고
잎새마다 솔바람 맑은 소리
달빛을 키웠네
내 몸 살리고 간 숱한 밥그릇들
은혜로운 밥상이여 생명이여

새벽 별 벗하여 법당으로 향한다
“지심귀명례...
지극한 마음으로 목숨 바쳐 돌아가 의지합니다.
가장 낮은 자세로 두 손 모아 무릎 꿇고 고개 숙여 절합니다.”
적막강산 울려 퍼지는 저 소리
첫 마음 푸른 싹 모아
백팔 배를 올리면
새벽 산, 이마에 맺히는 이슬

학인 스님들 독경소리 들을 때 마다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스스로도 모르는 소리 얼마나 많이 뇌알였던가
가사자락 펄럭이며 또 얼마나 헛되이 헤맸던가
나 온 곳을 모르고 가는 곳을 모르니
오직 지금 여기만을 살겠네

“도력이 없으면 방울 물도 소화하기 어렵다”는 법어에 기대
극락교 건너 산길을 간다
산비둘기, 박새, 까마귀, 다람쥐...
작은 풀꽃과 햇살들, 마른 나뭇가지, 길가 돌탑들,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작은 시냇물, 이끼 낀 기왓장...

작고 이름 없는 것들
볼 때마다 다르기도 하고 같기도 한
눈물겹고 애틋한 것들
무수히 밟고 지나며
아픔만 심어 주었구나

아- 산에 살아도
산으로 가고 싶지만
갈 수 없는 그 산이 나는 그립네


너의 노래 - 정태춘

아주 오래된 나무 그늘 아래
지친 걸음 쉬어가는 나그네처럼
나도 내 생 어느 길목에서 그런 널찍한
나무 그늘을 만날 수만 있다면
아주 멀고 먼 옛날이야기에 흠뻑 취해버린 아이처럼
나도 때때로 소낙비에 젖듯
너무나 조용해서 행복한
너의 노래 속으로
젖어 들어갈 수만 있다면

높은 절벽과 그 너머 바다와
그 위로 해와 달과 어우러지는 노을과
그 모든 걸 품고 떨리는
너의 노래 속으로

아주 기나긴 상념을 털어내고 벽을 향해 돌아눕는
한 시인처럼

나도 가끔씩은 그렇게 깊고 허망한 잠을 청할 수만 있다면
짙은 안개와 그 너머 바람과
억새 흩날리는 길들을 따라
흘러
흘러만 가는 노래로

멀리
높은 강둑길로
삽 들고 제 논 나가는 농부처럼
나도 그렇게 무심하게
저들의 거리로 나설 수만 있다면
너의 조용한
조용한 노래를 부르며


세한 - 김선우

비로자나 비로자나 깊고 찬 밤이 오더라도
진땀 흘리다 갈 얼룩진 발밑 세상으로
눈보라 스미어 붉은 잇속 금 간다 해도
놓지 못한 마음이 보이긴 하겠네
눈 밝으니 나를 나무라겠네
비로자나 비로자나 그때에도 자취 없는 나는
처음의 사랑을 종자처럼 데리고 이슬에 밟힌 누란을
이웃거릴 딸
고통 없는 사랑이 어디 있으리
해진 배내옷처럼
두려움 많은 사랑이 화엄 세한을 지나오니
받으소서 받으소서 세한 한 겹 두 겹 속으로,
받으소서 받으소서 두려움없이


견딜 수 없는 사랑은 견디지 마라 - 강제윤
견딜 수 없는 날들은 견디지 마라
견딜 수 없는 사랑은 견디지 마라

그리움을 견디고 사랑을 참아
보고 싶은 마음 병이 된다면
그것이 어찌 사랑이겠느냐
그것이 어찌 그리움이겠느냐

견딜 수 없이 보고 싶을 때는 견디지 마라
견딜 수 없는 사랑은 견디지 마라

우리 사랑은 몇 천 년을 참아 왔느냐
참다가 병이 되고 사랑하다 죽어버린다면
그것이 사랑이겠느냐
사랑의 독이 아니겠느냐
사랑의 죽음이 아니겠느냐

사랑이 불꽃처럼 타오르다 연기처럼 사라진다고
말하지 마라
사랑은 살아지는 것
죽음으로 완성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머지않아 그리움의 때가 오리라
사랑의 날들이 오리라
견딜 수 없는 날들은 견디지 마라
견딜 수 없는 사랑은 견디지 마라



그리운 바다 - J . 메이스피일드

내 다시 바다로 가리, 그 외로운 바다와 하늘로 가리
큼직한 배 한 척과 지향할 별 한 떨기 있으면 그 뿐
박차고 가는 바퀴, 바람의 노래, 흔들리는 흰 돛대와
물에 어린 회색 안개 동트는 새벽이면 그뿐이니
내 다시 바다로 가리, 달리는 물결이 날 부르는 소리
거역하지 못할 거칠고 맑은 부름 소리 내게 들리고
흰 구름 나부끼며 바람 부는 하루와 흩날리는 눈보라
휘날리는 거품과 울어 에이는 갈매기 있으면 그 뿐이니

내 다시 바다로 가리, 정처 없는 집시처럼
바람 새파란 칼날 같은 갈매기와 고래의 길로
쾌활하게 웃어대는 친구의 즐거운 끝없는 이야기와
지루함이 다한 뒤의 조용한 잠과
오, 아름다운 꿈만 있으면 그 뿐이니


밤비 - 헤르만 헤세
잠에 깊이 빠져들었는데 빗줄기가 굵어
결국 눈을 뜨고 말았네
지금은 빗소리가 나를 휘감았다
싸늘하고 촉촉한 수천 개의 목소리
빗소리가 이 밤을 충만하게 채우네

소색이는 듯, 때론 웃음, 그리고 긴 탄식
여러 소리들이 뒤엉켜 젖어들고
나는 소리에 홀려 귀를 종그린다

지난여름의 고행 끝에
그 바짝 타들던 소리들 끝에 들려오는
비의 보드라운 울음이여
이 친근하고 가슴 떨리는 목청이라니!

그러하리라, 새침때기와
도도할 따름인 가슴마다에
마침내 어린아이와 같은 심성이 깨어나
환희의 눈물샘이 콸콸 넘쳐흐르면
저마다 닫아두었던 마음의 입술을 열고
행복과 번민의 길이 새롭게 열리리라
내 영혼은 새처럼 날개를 펼치리라



그 누구도 혼자 걷지 않기를 - 작자 미상
그 누구도 가슴이 비어있지 않기를
그 누구도 한 끼 밥을 굶지 않기를
그 누구도 서로 해치지 않기를
그 누구도 친구가 없다고 느끼지 않기를
그 누구도 고통 속에 울지 않기를
그 누구도 비바람에 젖지 않기를
그 누구도 추위 속에 떨지 않기를
그 누구도 창살 안에 갇히지 않기를
구 누구도 어둠 속에 혼자 걷지 않기를
우리 모두가 마음속의 환한 등불 밝히기를



진광 스님
1977년에 운문사에서 명성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운문사 강원 대교과를 마쳤다. 이후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텍사스 주 휴스턴에 있는 Southwest Zen Academy에서 한동안 선禪 수련을 하였다. 영남대학교 대학원 미학 미술사와 철학과 박사과정을 마치고 현재, 운문사 승가대학에서 학인들을 가르치고 있다. 스님은 30여년 넘게 산에 살면서 자연을 사랑하고 평화를 노래하며 작고 소소한 것에도 감동, 감사, 행복해 하는 소욕지족의 소박한 삶을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