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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병기 - 황병기 가야금 작품집 Vol.5 / 달하 노피곰

한국 창작음악의 태두 황병기선생이 15년 만에 선보이는 최신 작품집.
여창가곡과 대금등 다양한 악기를 포함한 다양한 음악적 성과를 망라한 황병기 선생의 깊고도 넓은 음악세계를 조망한 새로운 걸작!

가야금 고유의 배경음과 여음을 살리기 위해 질그릇을 이용한 가야금 본연의 소리를 담은 오디오 파일 레코딩
[미궁] 이후 처음으로 시[詩]와 소리[聲]의 협연을 담은 작품

“초스피드 시대의 세계에 해독제로서 특별히 가치 있는 음악" -스테레오 리뷰(미국)
“만일 한 개인이 한 나라의 음악을 대표할 수 있다면, 한국 음악을 대표하는 인물은 단연 황병기라 하겠다.” - 앤드류 킬릭 (영국 셰필드대학교 음악학 교수)


모순을 명상하는 선(禪)의 경지 - 황병기의 음악 세계

앤드루 킬릭  (영국 쉐필드대학교 음악학 교수)

한국음악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황병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한국의 "전통음악" 즉 국악을 얘기하려면 다른 어떤 이름보다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국악은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통음악과 전통악기를 위해 새롭게 작곡된 음악 모두를 포괄하는데, 황병기는  40년이 넘도록 이 둘 모두에서 가장 빛나는 별이었다. 그는 전통음악인 산조를 그만의 독특한 형태로 발전시킨 ‘황병기류 가야금산조’를 악보로 출간하고 제자들을 가르친 유일한 음악가인가 하면, 그가 창작한 작품들은 이제 모든 가야금 연주자들의 주요 레퍼토리가 되었다. 그는 국내에서 이미 수많은 대학원 논문들과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는 물론, 아이들 책에까지 등장하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국외에서도  연주, 강의, 그리고 글을 통해 대한민국을 대표하고 있다.  1990년에는 남북이 함께 참가한 "평양범민족통일음악회"에서 남측을 대표하기도 했다. 만일 한 개인이 한 나라의 음악을 대표할 수 있다면, 한국 음악을 대표하는 인물은 단연 황병기라 하겠다.

그러나  황병기는 대표자이기 이전에 엄연한 한 개인이다. 이 점이 바로 그의 삶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몇몇 모순들 중의 하나이다. 그는 1950년대 이후 국악 발전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면서도 여러 면에서 보편적인 흐름을 거스른 사람이다.  한편으로는 문화재위원회의 영향력 있는 위원으로서 정부 지원과 보존이 필요한 전통음악과  관련된 사항들에 참여해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단순히 보존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무형문화재 제도가 시작되던 1962년 바로 그 해에 '숲'이라는 제목의 가야금을 위한 최초의 현대 독주곡을 작곡하여 새로운 전통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한국에 전통음악학과가 처음 생겼을 때부터 한국 최고 수준인 서울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훌륭한 연주자와 음악학자 들을 길러내면서도 서양 현대음악 작곡가들과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 새로운 연주기법을 창안했다. 예를 들어, 이 앨범의 ‘자시(子時)’ 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한국 악기들을 위한 새로운 연주기법들을 개발해냈다. 하지만 작곡가로서 그는 여전히 외로운 주역이다. 많은 다른 작곡가들이 그의 음악에 감화되어 한국 악기를 위한 새로운 음악들을 작곡했지만 그 어느 누구도 그의 독창성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시대적인경향을 견인하는 동시에 인습을 타파하는 두 가지 역할을 함께 수행하는 것은 그의 삶이 보여주는 모순 중의 그저 한 부분일 뿐이다. 또 하나의 모순은 작곡가로서의 그의 정체성이다.  황병기는 그 자신의 글에서 창의성이 절제된 즉흥의 형태로, 그리고  원작자가 알려져 있지 않은 작품을 점진적으로 다듬는 형태로 만들어지는 전통한국음악에는 사실  서양식 개념의 "작곡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황병기는 작곡가로서 자신이 서양음악 스타일을 따르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어렸을 때 받은 첫 음악 교육도 서양 음악이었고 처음부터 서양의 기보법을 사용하여 작곡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음악은 전혀 서양화한 음악이 아니다. 그의 음악에는 전통악기를 위한 곡을 쓰는 많은 동양 작곡가들이 흔히 사용하는 화성적 반주와  두터운 짜임새가 보이지 않는다. 그의 음악은 한국전통음악의 어휘를 넘어서면서도  언제나 분명하게 한국적이다. 황병기는 실제로 서양의 음악적 요소들을 자신의 핵심적인 음악언어로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시계탑'에서 보듯이 서양음악적인 요소들을 서양이라는 지역적인 색체 효과를 내기 위해 가끔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음악에 나타난 모순을 더욱 심도 있게 보여주는 것은 그의 음악이 결코 타협하지 않는 한국적인 음악적 섬세함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청중들에게 크게 어필한다는 사실이다. 그의 첫 음반은 미국에 처음 소개되었을 때부터 엄청난 호응을 불러일으켰고, 그의 연주는 미국, 유럽, 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대단한 명성을 얻었다. 그의 초기 작품 ‘가을’은 훗날 동양음악에 관한 미국 라디오 프로그램의 주제 선율로 사용되기까지 했다.  이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한국적인 것의 세계화’의 한 예를 보여준다.

또 하나의 모순은 황병기의 현대 작품들이 혁신적인 것으로 인정받으면서도  순식간에 "고전"으로 받아들여져 어느새 한국전통음악처럼 취급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침향무’(1974)는 가야금의 전통적인 조율 방법을 변화시켰고 가야금과 장구에 파격적인 새 연주기법을 소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매주 국립국악원에서 열리는 정기 전통음악 음악회 프로그램에 채택된 최초의 현대 작품이 되었고, 다른 여러 음악회에 작곡가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전통음악인양 소개되기도 했다. 반면, 황병기의 전통음악 연주는 그의 스승으로부터 배운 산조에 그만의 독창적인 선율을 보탠 점에서 파격적이다. 그러나 이 같은 일은 사실 기존의 산조를 그대로 외워 연주하는 현재의 관습에 비하면 오히려 더 전통적이다. 여기서 그는 또 한 번 전통이란 보존은 물론, 창의성과도 상통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의 음악 표면에 드러나는 엄청난 소리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황병기의 개성이 모든 작품에서 빛을 발한다는 점이 또 다른 모순이다.  그의 첫 창작곡인 ‘국화 옆에서’는 거의 전통적인 가곡처럼 들리고, 이번 앨범에 수록된 '고향의 달‘은 강원도의 민요에 가깝다. 하지만 가야금과 목소리가 아우르는 ‘미궁’은  고정된 음들과 리듬의 틀을 벗어난 소리들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아방가르드 음악이다.  황병기는 그 자신의 소리인 한국소리를 잃지 않으면서, 시간과 공간 모두에서 한국전통음악의 소리 세계를 초월했다. 현존하는 전통 국악의 레퍼토리는 유교 조선시대(1392-1910)에 형성된 것이지만, '침향무'와 '가라도′와 같은 작품에서 보면 황병기는 신라시대(?-935)의 불교문화에서도 영감을 얻었다. 바깥  세상으로 눈을  돌려 음악의 영감을 찾을 때, 그는  ‘비단길’과  이번 앨범의 ‘하마단’에서 보듯이 서양보다는 다른 동양 문화권들을 들여다보았다.  만일 이 모든 영감의 원천들이 황병기의 음악적인 색채를 다양하게 해줬다면, 그는 또한 음악적인 상황에 상당히 유연하게 대처하며 여러 상황에 맞는 다양한 음악들을 작곡했다. 그는 독자적인 취향과 양식을 양보하지 않으면서도 다양성을 이뤄낸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작품들은 각각 다르지만, 제가끔 황병기의 지문을 갖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모든 모순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어쩌면 우리는 그들을 이해하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왜냐하면 모든 예술의 향유에는 풀리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모순과 부정의 요소가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선불교에서 말하듯이, 모순이란 명상하기 좋은 것이며 황병기의 음악은 명상하지 않고 들을 수 없다.  바로 이 점이 이 시대의 한국과 서양의 청중에게 그의 음악이 다가갈 수 있는 중요한 이유다. 그래서인지 미국의 음반비평지 Stereo Review는 그의 음악을 "초스피드 시대의 세계에 해독제로서 특별히 가치 있는 음악"이라고 평했다. 그의 음악이 언제나 느린 것은 아니지만 거의 언제나 느리고 명상적인 분위기로 시작하고 끝을 맺는다. ‘시계탑’의 마지막 악장에서와 같은 빠른 기교적인 부분에서조차 "정중동"의 느낌이 살아 있는 것이다. ‘미궁’에서조차, 그가 1960대 말의 자유분방한 즉흥연주에서 이 앨범에 들어 있는 '낙도음(樂道吟)′의 도교 세계와 '차향이제(茶香二題)′의 탐미주의에 이르기까지 그의 모든 음악에 흐르는 명상의 정신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불교 성가의 마지막 악절을 사용했다.

음악학적으로 볼 때 이러한 명상적 특성을 만들어내는 두 가지 속성이 있는데,  교묘한 리듬(종종 변화하는 박자들을 수반하는) 그리고  가볍고, 투명한 텍스추어가 그것이다. 어느  한 순간에도 모든 것이 분명하게 들리도록 하기 위한 지나침은 없지만,  그들이 결코 평이하거나 노골적이지 않다. 그의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무언가를 분명히 보고 있다는 느낌은 들어도 실제로 보고 있는 것은 대단히 복합적이고 모순적이다.  진정한 선의 경지에서 우리는 모순을 명상하고 있는 것이다.

번역 채현경(이화여대 음악학 교수)


[수록곡 소개]

1. 달하 노피곰   - 10′12″  (17현가야금: 황병기, 장구: 김정수)
 1996년 두산 그룹의 창립100주년 기념 이벤트를 위해 위촉받아 작곡된 곡으로, 백제가요 「정읍사(井邑詞)」의 첫 구 ‘달하 노피곰 돋으시어 어긔야 멀리곰 비취오시라’에서 악제(樂題)를 따왔다. 멀리 장사 나갔다 오랜만에 돌아오는 남편에게 달이 높이 비추어 편안한 귀가길이 되기를 바라는 아내의 훈훈한 마음과 간절한 염원을 주제로 작곡된 곡이다. 총 5개 악장으로 구성된 곡으로 제1장 ‘경건하게’는 화음으로 꾸며진 우아한 선율이 달밤의 운치를 자아낸다. 제2장 ‘중중모리’는 흥겨운 무곡풍의 가락으로 진행되다가, 제3장 ‘엇모리’로 넘어가며 그 흥이 더욱 고조된다. 제4장 ‘고요하게’는 잠시 제1장의 분위기로 돌아가서 반복되는 지속음형을 배경으로 고음역의 고요한 선율이 잔잔하게 흐른다. 제5장 ‘휘모리’는 작품의 클라이맥스를 이루는 격정적인 가락으로 되었는데 중간에 유명한 동요 ‘달아달아 밝은 달아’의 가락이 삽입되어 있다. 17현 가야금으로 연주되는 이 곡은 우리 음악만이 지닐 수 있는 격조 높은 단순미, 드라마틱한 음악적 전개, 풍류의 멋 등을 두루 함축하고 있는 황병기 특유의 신고전주의적 명작으로 조명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2. 시계탑   - 9′37″  (17현가야금: 황병기, 장구 김정수)
 1999년 황병기는 서울대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입원해 있던 때가 있었다. 그동안 그 곳의 상징물격인 고풍스러운 시계탑을 창문 너머로 보면서 작가는 이 곡을 구상하였다고 한다. 전체 4개 악장으로 이루어진 17현 가야금을 위한 작품이다.
제1장은 약간 느리고 담담한 가락으로 시작하여 차츰 도약진행과 장식음형이 삽입되고 리듬이 미묘하게 변화된 후 제2장을 예비하는 경쾌한 선율로 끝난다. 제2장은 시계 소리를 연상시키는 4/4 박자의 서양풍의 아름다운 선율로 진행되고, 제3장은 중중모리 장단의 발랄한 춤곡으로 전개되며, 제4장은 빠른 3연음형으로 일관하는 환상적 가락으로 펼쳐진다. 전반적으로 고난도의 연주기교가 요구되는 곡으로 가야금으로 그려낼 수 있는 완성도 높은 형식미를 만끽케 하는 작품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뮤직박스 스타일의 보석함을 열어 놓았을 때의 분위기와 그 속에서 면면히 피어오르는 영롱한 그리움 같은 다소 애잔한 감성의 흐름이 전반에 걸쳐 잘 실려 나오고 있는 점도 이 곡의 매력이 되고 있다.

3. 하마단   - 9′03″  (12현가야금 : 황병기, 장구 김정수)
금암회의 위촉으로 2000년에 작곡된 12현 가야금을 위한 작품이다.
제목 하마단(Hamadan)은 이란의 테헤란 서남쪽에 있는 옛 페르시아 시대부터 있던 고대 도시의 이름이다. 승려시인 현담의 시「하마단」을 읽고 시인 곽재구가 쓴「존재의 따뜻한 길」이라는 수필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열린 지하 셋방의 문틈으로 들어온 햇살 속에서 만나는 먼지들의 춤을 볼 때와도 같이, 이 시는 존재의 먼 심연에 이르는 희미한 길과 안개가 펼쳐져 있을 것만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 작품은 바로 이러한 “존재의 먼 심연에 이르는 희미한 길과 안개가 펼쳐져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을 그려내고자 한 곡이다.
제1장은 아련하면서도 비감이 서린 중용 속도의 중모리 가락으로 되었다.
제2장은 자진모리 가락으로 제3장을 예비하기 위한 일종의 경과적인 다리 역할을 한다. 제3장은 본격적인 먼지들의 춤곡인데 급속한 템포로 다양한 박자가 구사되며 휘모리로 전개되는데 마지막 절정에 달하면 왼손으로 비음악적인 tone cluster의 불협화음을 연타하다가 문득 고요하게 가라앉으며 끝난다.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을 향한 영원한 노스탤지어를 절제된 정감으로 승화시키는 듯한 분위기가 작품 전반에 걸쳐 면면히 흐르고 있는 곡이다.

4. 자시(子時)   - 6′20″  (대금 : 홍종진)
1978년 미래악회 작곡발표회에서 초연된 무반주 대금 독주곡이다.
‘자시’ 즉, 한밤중의 초현실적인 순간을 대금 소리로 스케치했는데, 음진행과 리듬이 모두 특이하다. 서정성을 띤 전반부가 끝나면 짧은 싯귀를 낭송한 다음 후반부로 들어가는데, 혀 떠는 소리와 목소리를 섞어서 부는 취법이 사용되어 극적인 분위기를 이룬다. 곡의 종결부에서는 입술을 떨어서 나발을 불듯이 대금을 연주하는데, 입김이 대금 속을 통과하면서 바람 소리처럼 공허하게 울리는 잡음으로 종지된다. 악상에 있어서나 기교적인 면에서나 전통악기로 연주되는 전례 없는 현대적인 대금 곡으로 곡 전체에 걸쳐 무의식의 세계에서 자유로운 환상의 여행을 하는 분위기가 이어진다.

5. 낙도음(樂道吟)  - 11′42″  (거문고 : 허윤정, 장구 : 김정수)
2002년에 작곡된 거문고 독주곡이다.
악제(樂題)는 ‘즐겁게 도를 닦는 사람의 읊조림’이라는 뜻으로, 12세기 초 고려의 학자 이자현(李資玄)의 동명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이자현은 나라 음악을 관장하던 대악서(大樂署)의 승(丞)에 이르렀지만 홀연히 청평산(淸平山)으로 들어가 자연 속에 묻혀 거문고를 타고 살았는데, ‘낙도음’이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한 곡조 타도 무방하지만 (不妨彈一曲)
알아들을 사람이 너무 적구나 (祗是少知音)
이 작품은 거문고의 특색에 충실한 가락으로 도사의 탈속한 경지를 나타내고자 했다.
제1장은 느린 8박에서 6박으로 변하고, 제2장은 중중모리, 제3장은 자진 중모리이며, 제4장은 자진모리이지만 끝부분은 휘모리로 여며진다. 선율은 黃 太 仲 林 無(레 미 솔 라 도)의 5음을 바탕으로 姑 南 應(솔♭시 레♭) 등 3음이 임시음으로 추가되어 모두 8음을 활용한다. 음역은 무현(武絃)의 㣩(B♭) 음에서 유현(遊絃) 16괘의 㶐(d') 음까지 무려 3옥타브 장3도에 이른다. 전체적으로 추상적인 현묘한 멜로디와 불규칙하고 강렬한 비트감이 순조롭게 조화를 이루면서 함축미 넘치는 한 편의 대형 수묵화를 연상케 한다.

6. 고향의 달  -5′21″   (노래: 강권순, 12현가야금: 이지영, 장구: 김정수)
박목월의 향토색 짙은 동명의 시에 곡을 붙여 만든 성악곡으로 1976년 문예진흥원 위촉으로 작곡된 작품이다.  곡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강원도 민요풍이지만, 그 구성과 진행은 정악의 구조를 채택하고 있다. 처음에는 가사를 낭독하듯이 읊다가, 뒤에는 느리고 애절한 가락으로 변한다. 창자와 연주자 모두에게 감정이입을 최대한 억제하여 작품을 제3의 객체로 삼고서 벽돌 한 장, 한 장으로 구조물을 공고히 쌓아나가듯 음악적 전개를 요구하는 작품이다.

고향의 달  (작시 : 박목월)  
        
휘영청 밝은 저 달은 고향의 달일세, 고향의 달일세.
천리를 떠나와도 날 따라오네, 날 따라오네.
고향산천 그리는 이 마음이사 변할 리 없네, 변할 리 없네.

(후렴) 저 달을 볼 적마다 님의 얼굴 떠오르네.

휘영청 밝은 저 달이 고향으로 가자네, 고향으로 가자네.
달 따라 고향가서 밭이나 갈며, 밭이나 갈며.
알뜰살뜰 새살림 터 잡아서 살아볼거나, 살아볼거나.


7. 차향이제(茶香二題)  -9′52″  (노래 : 강권순, 17현가야금 : 이지영, 장구 : 김정수)
이 작품은 한국창작음악연구회의 위촉으로 1998년 발표된 곡이다. 차(茶)를 주제로 한 박경선의 아래와 같은 두 수의 시에 곡을 붙이고 이를 하나로 묶어서 ‘차향이제’라고 이름을 지은 성악곡으로 반주는 17현 가야금과 장구이다.  첫 노래 <차를 다리네>는 E음 계면조의 잔잔한 노래인데, 장단은 느린 도드리 풍이고, 가야금에서 화음을 많이 사용하는 점이 특징적이다. 둘째 노래 <차를 마시네>는 A음 계변조의 애틋한 노래인데, 흥겨운 타령장단이다. 듣는 이로 하여금 무념(無念), 무상(無想), 무감(無感)을 자연스레 갖도록 이끄는 명상적이고도 관조적인 기운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차를 다리네   (작시 : 박경선)

가슴으로 마시는 향기 마음 속 풀리네
고운님 더불어 햇살 번진 뜨락 연초록 바람 머무는 자리
목마름 달가워라 그리운 자리
숨소리 은은한 차를 다리네

지창으로 얼비치는 그림자 하나
아득한 밤하늘의 별을 담아 오시나
소롯이 띠운 세월 기다림으로
숨소리 은은한 차를 다리네

차를 마시네  (작시 : 박경선)

이슬비 푸른 호수 물비늘 애잔하네
그 넋이 호심에 실리어 하 많은 그리움
억만년 나눔 슬기 차의 숨줄 따습고
오늘도 그 맛으로 차를 마시네

산마루 걸린 안개 호수로 고이는데
그리움 물보라 타네 님이 있어서
연두빛 정감으로 차는 넘쳐 아파라
오늘도 그 맛으로 차를 마시네
8. 추천사 (鞦韆詞)  -5′36″  (노래 : 강권순, 17현가야금 : 이지영)

서정주의 동명의 시에 선율을 붙여 성악과 가야금을 위한 듀오 작품으로 2001년에 발표하였던 곡.
언뜻 흥겨운 그네뛰기 노래 같지만 세속적인 즐거움을 넘어서 참된 진리의 세계를 지향하려는 고뇌와 운명적 한계의 자각에 따른 번민 등을 표현한 작품이다.
제재인 시에 함축된 심리 상태가 작곡가 특유의 개방된 상상력으로 다각도에서 심도 있게 도출되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전체적으로 중중모리의 흥겨운 장단으로 일관되지만 마지막 4절의 첫구 “서(西)으로 가는 달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에서는 느린 진양조의 두 장단으로 진행되는데 특히 첫 장단은 무반주의 소리만으로 흐르면서 현실과 이상의 대립에서 야기되는 비장한 맛이 표현되고 있다.
가야금 반주에 나타나는 그네를 뛰는 듯한 리듬 패턴도 독창적인 멋을 담고 있어 괄목 할만하다.

추천사  (작시 : 서정주)

향단(香丹)아 그넷줄을 밀어라.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 밀듯이,
향단아.

이 다소곳이 흔들리는 수양버들나무와
베갯모에 놓이듯한 풀꽃더미로부터,
자잘한 나비 새끼 꾀꼬리들로부터
아주 내어 밀듯이, 향단아.

산호(珊瑚)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
나를 밀어 올려 다오.
채색(彩色)한 구름같이 나를 밀어 올려 다오.
이 울렁이는 가슴을 밀어 올려 다오.

서(西)으로 가는 달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
바람이 파도를 밀어 올리듯이
그렇게 나를 밀어 올려 다오.
향단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