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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ipper's Guitar (플리퍼스 기타)
시부야계의 황금 컴비 오자와 겐지와 오야마다 게이고의 진면목이 부각된 걸작

#4. Shibuya-Kei Most Wanted "Flipper’s Guitar"
- 몇 해 전 일본 HMV에서는 음악 전문가들의 의견을 토대로 일본 팝 음악 역사에 있어 가장 놀라운 성과를 거둔 100대 아티스트를 발표한 바 있다. 지금까지도 놀라운 저력을 발산하고 있는 서던 올스타즈가 1위를 차지한 가운데 무엇보다도 실험성이 강한 시부야계와 컬리지 뮤직 아티스트들의 포진이 돋보이는 대목이었다. 미스터 칠드런(27위), 스핏츠(29위), 피치카토 파이브(43위) 피쉬만스(83위), 오리지날 러브(89위) 등을 제치고 가장 눈부신 평가를 받은 팀은 다름 아닌 플립퍼스 기타였다. 순위권 아티스트 중 가장 짧은 단 3년간의 활동만을 펼친 플립퍼스 기타가 15위에 랭크된 것도 놀라운 사실이지만, 여느 팀과 달리 두 멤버인 오야마다 게이고(43위/코넬리우스)와 오자와 겐지(79위)까지 모두 순위권에 랭크됐다는 사실은 이들의 음악성과 영향력을 보여 주는 대목일 것이다.

- 80년대 후반부터 90년 초에 이르기까지 일대 붐을 야기시킨 시부야계에 있어 플립퍼스 기타는 피치카토 파이브, 오리지널 러브 등과 함께 중요한 인자로 손꼽히는 팀이다. 비틀즈처럼 혁신적인 음악과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고 싶었던 플립퍼스 기타는 단 석장의 정규 앨범만을 남겼을 뿐이지만, 그 공적과 음악적 성과는 십수년의 세월이 흘러도 전혀 퇴색하지 않고 영원의 힘을 입어 빛을 발하고 있다. 애초의 플립퍼스 기타는 히트와 거리가 멀어 보였다. 음악적으로도 생경한 면이 많았고, 기성의 잣대로 평가했을 때 여러모로 애송이였기 때문이다. 본인들은 “팔리는 음악을 하고 싶다.”고 늘 얘기했지만, 음악적으로 일본 특유의 뽕기를 포함한 음악도 아닌 매번 팬들의 기대를 철저히 배신(?)하는 결과물을 제시했고, 팬들과 매체를 대하는 태도도 불손하기 그지없었다. 이는 오히려 매니아들을 몰입하게 만드는 매력이자 중독성이 되어 ‘음악은 좋지만 성격이 나쁘다’라는 매체의 평가에 대해 ‘성격만 좋고 음악이 나쁜 것 보다는 낫다. 역시 훌륭한 거물’이라는 식으로 옹호하게 만들기도 했다.
- 플립퍼스 기타는 최전성기를 치닫고 있을 시점인 1991년 10월 29일 돌연 해체를 결정했다. 확실한 배경은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지만, 소문으로는 ‘한 여자를 사이에 둔 삼각관계’, ‘음악적인 의견 충돌’, ‘전설로써 이름을 남기고 싶었던 바램’ 등으로 압축되고 있다. 이 중 음악적인 의견 충돌설이 가장 설득력을 갖고 있는데, 그 이유는 솔로 전향 후 각자 선보인 음악들이 극단적으로 상이했기 때문이다. 오자와 겐지의 경우 완벽한 멜로디와 시적인 가사를 앞세워 흑인 음악의 어프로치를 시도했고, 오야마다 게이고는 코넬리우스로 이름을 변경한 후 싸이키델릭한 사운드와 공격적인 기타 리프를 주로 선보였다. 어쨌거나 이들은 많은 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재결합이나 협연을 하지 않았고, 팬들은 물론 본인들까지도 그토록 염원하던 대형 콘서트를 세상에 보여 주지도 못했다. 참고로 이 당시 최전성기의 플립퍼스 기타에 걸맞는 대형 콘서트와 전국 투어를 기획하던 소속사는 이들의 갑작스런 해체로 공연 취소에 대한 위약금을 물며 대 적자를 기록했었다고.

- 젊음을 담보로 천재 둘이 함께 협연한 음악과 삶의 광폭한 질주는 오야마다 게이고 22세, 오자와 겐지 23세라는 어리디 어린 나이에 마무리됐지만, 플립퍼스 기타라는 이름은 아직까지도 일본 대중 음악 역사상 최고의 천재 집단이란 수식어로 기록되고 있다.

#5. 오자와 겐지 VS 오야마다 게이고
- 플립퍼스 기타의 활동부터 현재에 이르는 동안 오자와 겐지와 오야마다 게이고는 라이벌로 경쟁과 성장을 부추긴 음양의 관계였다. 밴드 초기 오자와는 기타에, 오야마다는 보컬에 큰 포지션을 두고 활동했으나, 솔로 전향 후에는 입장이 완전히 바뀌어 오자와가 보컬 위주로, 오야마다가 기타 연주로 더 빛을 보았다. 솔로 초기 대중적인 싱글 커트 위주의 활동을 펼치던 오자와였지만, 오야마다가 코넬리우스로 이름을 바꾸며 실험적인 사운드를 펼치자, 오자와 역시 3집부터 프리 재즈와 제 3 세계 음악의 혼용을 보이며 점차 대중성과 먼 음악들을 선보이게 됐다. 오자와가 흑인 음악적 어프로치와 다양한 편곡에 재능이 있었다면 오야마다는 하드록과 미니멀한 편곡에 보다 관심을 나타냈다. 그렇기에 되돌아 생각하면 플립퍼스 기타의 1집은 두 아티스트의 태동과 혼재, 2집은 오자와 겐지의 취향, 3집은 오야마다 게이고의 관심사가 담긴 앨범으로 구분 되어 질 것이다.

- 네오 시부야계로 묘사되는 90년대 말 이후의 음악들(이미 전설이 된 Kirinji, Nona Reeves, Spanova부터 최근의 신생 팀들까지)은 오자와 겐지의 솔로 1, 2집이 교과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흡사한 점이 많으며, Japanese Invasion을 선도한 팀들(Buffalo Daughter, Seagull Screaming Kiss Her Kiss Her, Cibo Matto 등 다수)에게는 오야마다가 정신적 지주였다. 재밌는 점은 오야마다의 최대 히트작이었던 카지 히데키가 오자와 겐지를 연상시키는 부분이 많았다는 것, 또한 지금껏 똑같이 5장의 정규 앨범을 발표했다는 것(타이밍 역시 서로 주거니 받거니 했다) 등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다. 결국 이들은 암묵적인 경쟁 관계였지만, 내심 상대를 동경해 온 소울메이트였던 것이다. 마치 폴 맥카트니와 존 레논이 그러했던 것처럼.

- 1968년 4월 14일 카나가와현에서 태어난 오자와 겐지는 소위 말하는 하이클라스 집안의 아들로 큰 걱정 없이 유복하게 성장했다. 대학 교수인 부모로 인해 어린 시절 독일에서 생활했고, 이후 모범적인 학창 시절을 보내며, 부모의 기대대로 동경대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음악적인 재능과 괴짜의 기질은 부모가 아닌 큰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듯싶다. 그의 큰 아버지는 세계적인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 보스턴 교향악단, 신일본 필하모니를 비롯한 유명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을 역임한 세계 5대 지휘자이다(최근에는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러브콜을 거부한 인물로 매스컴을 장식했다). 대학 입학과 동시에 중학교 시절 테니스부 친구였던 오야마다 게이고의 요청으로 5인조 밴드 롤리팝 소닉에 합류하게 됐고, 메이저 계약과 동시에 플립퍼스 기타로 팀명을 변경, 3장의 충격적인 앨범을 발표하고 돌연 해산을 결정한다.

- 먼저 솔로 활동의 발동을 건 것은 오자와였다. 해체 후 학업에 정진하던 그는 1993년 2월 학교 졸업을 마치고 7월 싱글 ‘날씨 읽기’와 9월 솔로 데뷔 앨범 “개는 짖지만 캐러번은 달린다”를 발표하며 화려하게 씬에 복귀한다. 이후 2년여간 오자와의 활동은 대중적인 면으로만 따져 봤을 때 플립퍼스 기타를 상회하는 최절정기의 모습 그대로였다. 1994년 3월 힙합그룹 스차 다라 파와 함께 싱글 ‘이 밤의 부기백’이 시부야 젊음의 대명사 Parco 백화점 광고에 쓰이며 대히트를 기록했고, 훵키한 리듬이 돋보이는 싱글 ‘사랑은 사랑 받아 살아가는 것’이 토요다 자동차 광고에, 2집 최대 대표곡 ‘러브리’ 또한 시세이도 샴푸 광고에 연이어 사용됐다. 또한 뛰어난 학벌과 집안 배경, 감성적인 가사와 준수한 외모에 기인하며 그는 젊은 여성들을 소구하는 시대의 아이콘으로 각인됐고, 청춘스타의 전유물로 알려 진 쵸코렛 광고 모델과 청백가합전에 출연하는 등 커머셜한 면모를 갖추게 됐다. 허나 1996년에 발표된 3집 “구체가 연주하는 음악” 부터 그는 갑작스레 180도 변모하기 시작한다. 실험적인 부분이 강조된 음악을 선보이며 대중 앞에 서기를 꺼려했고, 이후 현재까지 단 2장의 정규 앨범(그것 역시 정규 앨범이라고 믿어 지지 않는)만을 발표했을 정도로 음악 작업에도 인색했다.

[小沢健二 discography]
- “개는 짖지만 캐러번은 달린다”(1993. 9. 29) – 1집
- “Life”(1994. 8. 31) – 2집
- “구체가 연주하는 음악”(1996. 10. 16) – 3집
- “Dog”(1997. 7. 24) - 1집 재발매반
- “Electric"(2002. 2. 27) – 4집
- “찰나(刹那)”(2003. 12. 27) - 앨범 미 수록 싱글 모음집
- “Ecology Of Everyday Life : 매일의 환경학”(2006. 3. 8) – 5집(연주 앨범)

- 1969년 1월 27일 도쿄에서 태어난 오야마다 게이고는 연예인 출신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 어려서부터 예술적인 가능성을 보였다. 와코 대학 부설 초, 중, 고교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던 시기, 우연하게도 Original Love, Little Creatures의 멤버들도 학교를 다녔고, 중학교 시절에는 오자와 겐지와 테니스부에서 활동했었다(이들과 함께 방과 후 레코드 샵을 방문하는 것은 중요한 놀이 수단이었음). 대학 시험이 끝난 오자와 겐지를 영입, 롤리팝 소닉을 탄생시켰고, 이후 메이저 계약 후 플립퍼스 기타로 이름을 바꿔 3장의 앨범을 발표하며 공전의 대 히트를 기록했다.

- 1991년 해체 후 솔로 앨범을 먼저 낸 쪽이 오자와 겐지였다면 음악씬에 먼저 복귀한 것은 오야마다였다. 1992년 레이블 트라토리아(Trattoria)를 설립, 프로듀서를 맡은 그는 CF음악과 한 때 연인 관계였던 프렌치팝 여가수 카히미 카리이의 앨범 프로듀서를 담당하며 음악적인 발전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1993년 혹성탈출에 나오는 인물에서 따온 이름인 코넬리우스(Cornelius)로 솔로 프로젝트명을 정한 그는 Bridge, Pizzicato Five 등의 앨범 프로듀서를 맡으며 시부야계의 거물로 재탄생한다. 코넬리우스와 트라토리아는 신경향 아티스트의 발굴뿐 아니라 해외 음반의 Re-issue도 병행했고, 심혈을 기울인 아트워크와 상품 개발, 콜렉터들을 자극하는 초판 아이템 등을 선보이며 해외에서도 주목 받는 레이블로 단시일 내에 성장하게 되는데, 여기에 1994년 그의 대망의 솔로 데뷔 앨범 “First Question Award”가 공개되면서 대중적인 성공마저 거둔다. 코넬리우스의 본격적인 음악적 방향이 제시된 2집 “69/96”를 발표하면서 그는 문화 아이콘으로 평가 받게 됐고, 그 결과 다수의 CM송 제작과 드라마 음악 제작의 의뢰를 받는다. 1997년 발매된 3집 “Fantasma”는 싸이키델릭 사운드의 진수를 선보인 코넬리우스 최고의 명반으로 전 세계 26개국에 발매되면서 신종 사운드의 스페셜리스트로 거듭나는 계기가 된다. 이후 리믹스 작업에 매진하며 국내외 아티스트(Blur, Beck, Sting, 사카모토 류이치 외 다수)와 교류를 펼친 그는 작업물들을 담아 여러 장의 비정규 음반을 쏟아 냈고, 미국과 유럽의 대형 페스티벌 무대에도 오른다. 2002년 창립 10주년을 기념(?)하여 트라토리아 레이블을 해체하는 충격적인 사건을 저지른 그는 새로이 비주얼 아트에 대한 작품 활동을 병행함과 동시에 최근까지도 역작 “Point”와 “Sensuosus”를 발매하며 꾸준한 실험을 거듭하고 있다.

[小山田圭吾(Cornelius) discography]
- “First Question Award”(1994. 2. 25) – 1집
- “69/96”(1995. 11. 1) – 2집
- “96/69”(1996. 6. 9) - 69/96의 리믹스 앨범
- “Fantasma”(1997. 9. 3) – 3집
- “FM”(1998. 11. 26) - Fantasma의 리믹스 앨범
- “CM”(1998. 11. 26) - 코넬리우스 리믹스 작업 모음집
- “Point”(2001. 10. 24) – 4집
- “CM2”(2003. 6. 25) - 코넬리우스 리믹스 작업 모음집
- “PM”(2003. 7. 23) - Point의 리믹스 앨범
- “Sensuosus”(2006. 10. 25) – 5집

#6. ‘New Wave of J-Pop’이라 불린 미래적 사운드 ”Camera Talk”
- 플립퍼스 기타는 1집의 대성공 이후 일대 변화가 시작됐다. 아라카와, 이노우에, 요시다 등 3명의 멤버가 탈퇴하고 오야마다 게이고와 오자와 겐지 2인의 라인업으로 변모하게 된 것. 이들은 이름의 공통 이니셜인 K와 O를 따 Double Knockout Corporation을 설립, 음악 작업뿐 아니라 비즈니스 부분에도 관여하기 시작했고, 유럽을 여행하며 많은 아티스트들과 교류의 폭도 넓혔다. 이러한 바탕 위에 제작된 2집은 다소 풍요 해진 앨범 작업 환경 속에 진행됐는데, 최상의 소리를 뽑아내기 위해 노래마다 각기 다른 스튜디오와 세션을 기용한 버라이어티한 면모는 당시 일본 음반계에서 거의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회사의 적극적인 서포트와 위상은 최초의 1990년 3월 10일 발매된 첫 뮤직비디오 모음집인 “The Lost Pictures and three plus one”의 제작에서도 나타난다. 단 4곡짜리 영상집을 만들기 위해 여성 듀오 윙크(Wink)의 대히트로 생긴 회사의 여윳돈 3,000만엔 중 2,000만엔을 투입해 2박 3일 만에 속성으로 만들어 졌다고.

-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2집 “Camera Talk”는 1집이 발매된 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1990년 6월 6에 발매됐다. 이토록 빠른 작업 속도에 대해 두 멤버는 “데뷔 당시부터 우린 이미 준비가 된 상태였다.”라는 건방진 말투로 화답했는데, 나름 납득이 되는 것은 계속되는 매체 인터뷰, 싱글 발표, 공연, 광고 촬영, 유럽 여행에 이르기까지 쉴 새 없이 바쁜 일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내놓는 결과물마다 신기에 가까운 타이밍과 퀄리티를 자랑했기 때문이다. 또한, 음반사와 팬들의 요청에 의해 1집과 달리 전곡을 일본어 가사로 가창한 점도 주목할 만한 점. 결과적으로 2집 역시 음악적으로 뿐만 아니라 상업적으로도 대성공을 거두는데, 싱글 ‘Young, Alive, in Love 연인과 머신 건’은 사회 현상이 될 정도의 빅 히트를 기록했고, 그 결과 1991년 연말의 일본 음반 시상식에서 쟁쟁한 스타들을 누르고 뉴 아티스트상을 수상할 수 있었다.
- ‘Young, Alive, in Love 연인과 머신 건’은 1집과 2집의 가교 역할을 하는 트랙으로 앨범 발매 이전인 1991년 5월 5일 싱글로 선행 발매된 곡이다. TBS 방송국의 드라마 ‘예비학교 부기’의 주제가로 채택되며, 전에 없던 스윙 재즈적 느낌을 담아냈다. ‘Haircut 100 욕실에서 머리카락을 자르는 100가지의 방법’은 함께 싱글에 수록됐던 트랙으로 1집보다 프로페셔널스럽게 발전된 네오 아코 사운드(Neo-Aco Sound)를 담고 있다(80년대 영국의 명그룹으로 Nick Heyward가 멤버로 있었던 Haircut 100을 오마쥬한 곡이라는 후문). ‘Camera Camera Camera’는 2집의 음악적 변화(혹은 발전)를 보여주는 대표곡이다. 뉴오더를 연상케하는 날렵한 일렉트로닉 팝 사운드와 진보적인 주제 의식은 1집에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었던 부분. 본 작에 보너스 트랙으로 수록된 ‘Camera Camera Camera(Guitar Pop Version)’은 1990년 9월 25일 맥시 싱글로 발매된 버전(당시 싱글에는 본 작 수록곡인 ‘Big Bad Bingo’의 리믹스 버전인 ‘Big Bad Disco’와 ‘Cool Spy On A Hot Car’의 새로운 믹스 버전이 함께 수록되었음)의 수록곡으로 원곡과 다른 영국 메인스트림 기타 팝의 요소를 한껏 함축하고 있다.

- 앨범 전편을 강타하고 있는 느낌은 프로그래밍을 앞세운 뉴 웨이브적인 사운드이겠지만, 전작에 이어 Retro적인 요소들은 사이사이 양념처럼 등장한다. 고고와 서프 음악이 뒤섞인 ‘Wild Wild Summer’나 프렌치팝적인 편곡이 이목을 끄는 ‘Southbound Excursion’, 60년대 수사물을 연상시키는 연주곡 ‘Cool Spy On A Hot Car’ 등은 대표적인 넘버이다. 앨범 중 가장 로맨틱한 ‘Summer Beauty 1990 라틴에서 렛츠 러브 또는 1990 썸머 뷰티 계획'은 세련되고 상쾌한 음악을 하는 녀석들로 위장하기 위해 만든 곡이라고.

- 플립퍼스 기타는 본 작 이후 ‘Love Train’(1990년 11월 21일/‘Slide(Christmas mix)’ 추가 수록), ‘Groove Tube’(1991년 3월 20일/‘Groove Tube Pt.2’ 추가 수록), ‘Blue Shinin' Quick Star 별의 저 쪽에’(1991년 8월 25일/‘Dolphin Song’ 추가 수록) 등의 8인치 CD 싱글과 3집 앨범 “헤드 박사의 세계탑”(1991년 7월 10일)을 남긴 채 1991년 10월 29일 공식 해체를 발표했다. 이번 재발매반에는 앞서 소개한 ‘Camera Camera Camera(Guitar Pop Version)’ 외에도 ‘Love And Dreams Are Back’, ‘Cloudy(Is My Sunny Mood)’ 등이 보너스 트랙으로 특별히 수록되어 있는데, 이 두 곡은 바로 밴드 해체 후 전국 투어 취소(이미 티켓은 매진 상태)로 인해 야기된 소속사의 엄청난 비용 손해를 조금이나마 마련하기 위해 급조된 앨범 “Colour Me Pop”(1991년 12월 1일 발매. 플립퍼스 기타의 싱글 히트곡, 라이브 버전, 미공개 트랙을 모은 앨범)을 통해 처음으로 공개된 트랙들이다.

- 밴드 해체 15년을 즈음하여 탄생한 재발매반은 디지털 리마스터링에 보너스 트랙까지 더해 사운드의 퀄리티를 높였지만, 디자인만큼은 예전의 모습을 최대한 흡사하게 담아 내고 있다. 이것은 과거의 추억과 명반으로의 가치를 동시에 제공하는 선물처럼 여겨 진다. “일본의 뮤지션은 전부 싫다. 다행히 우리를 좋아하는 뮤지션도 없다. 그렇기에 그들과 함께 묶이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들이 평소에 했던 말이다. 신조류의 밴드로 늘 비교가 됐던 Unicorn(오쿠다 타미오가 멤버로 있었던)에 비해 성격이 좋지 않아 100만장을 팔지 못했다고 평가 받는 플립퍼스 기타, 오리콘 차트를 석권하며 대중을 호령한 탑 셀링 아티스트는 결코 되지 못했어도, 그들은 일본 대중음악의 ‘젊음’, ‘반항’, ‘도전’을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남아 지금도 계속하여 팬들의 마음속에 재탄생하고 있다.

[글 : sombre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