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0년대 중반부터 한국 대중음악계에 새바람을 몰고 온 바 있던 젊은 (영화)음악 베테랑 달파란, 장영규, 이병훈, 방준석등이 이 시대 최고의 영화음악집단 ‘복숭아 프레젠트’로 뭉쳐 ‘따로 또 같이’ 활약해온 그들이 한영애의 [Behind Time] 이후 2년만에 자신 있게 선택한 여가수 다이(dyE)!
뷰욕(Bjork)이 포티스헤드(Portishead)를 만난 것 같은 신비롭고 그로테스크한 전자음악.
‘영퀴’(영화퀴즈)라고 하면 이제 아련한 추억에 잠기는 이들이 많겠지만, 간만에 영퀴 하나 풀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여기서 문제!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후아유], [복수는 나의것], [나쁜영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텔미섬띵], [해안선], [철없는 아내와 파란만장한 남편, 그리고 태권소녀], [4인용 식탁], [...ing], [라이어], [얼굴 없는 미녀], [쓰리 몬스터], [알포인트], [귀여워], [가능한 변화들], [주먹이 운다], [달콤한 인생], [태풍태양]의 공통점은? 정답은 (영화)음악집단 ‘복숭아 Presents’의 구성원들이 사운드 트랙을 담당한 영화들이라는 점이다. ‘복숭아 Presents’란 이름이 생소하더라도 한국 영화(음악)계에 ‘일말의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라면 앞서 열거한 영화(음악)들이 2002년 이후 한국 영화(음악) 가운데 ‘볼륨’을 떠나 만만찮은 위상을 가진 작품들임을 직감할 수 있을 테고, 한국 영화음악에 평균 이상의 관심을 기울이는 이들이라면 2000년대 한국 영화음악계의 주요한 축으로 ‘복숭아 Presents’를 꼽기에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이내 ‘각설’하지 못하고, ‘전조(前兆)’라는 미명하에 사설을 길게 펼친 이유는 음반 [폐곡선(Closed Trace)]이 ‘복숭아 Presents’에서 발매된 때문만은 아니다. 이 음반이 영화음악 음반도 아닌데 긴 서론을 펼칠 까닭은 없으니까. 그보다는 이 음반의 주인공 및 참여 음악인과 관련이 있다. 이 음반의 주인공은 그간 ‘복숭아 Presents’에서 만든 영화 음악들을 통해 노래를 선보인 바 있는 다이(dyE)이고, 작.편곡가, 연주자, 프로듀서는 바로 ‘복숭아 Presents’의 ‘몸통’인 달파란, 장영규, 이병훈, 방준석이다. 그런데 대체 다이(dyE)가 어떤 인물이기에 그들이 나선 것일까. 다이(dyE)에 대한 정보는 본명이 이지선이란 것 외에 그리 많지 않지만, 유추할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마치 시집(詩集)에 적힌 자서(自序) 혹은 에필로그처럼, 그녀가 음반의 후감(後感)을 곁들여 소개한 ‘음악의 원천은 내면 속 깊은 감성이듯, 영화를 좋아하고 사진 찍기를 좋아하고, 그만큼 시각적 반응을 좋아하는... 모든 것이 나만의 영상으로 되살아나 음악으로 모아지는...’이란 문구라든가, 음반 크레딧의 ‘Thanks to’난에 등장하는 이름들을 일별하다 보면, 그녀가 한때 미대에 다니다가 그만두고 방송연예과로 전공을 바꿔 졸업한 ‘전력’이 어렴풋하게 드러나 있다. 20대 중반을 넘어서고 있는 나이에 데뷔하게 된 사정에도 무언가 사연이 있을 거란 짐작도 든다. 물론 그와 같은 개인사 혹은 사적 정보보다 중요한 것은 ‘노래하는 사람’으로서의 정보일 것이다. 전술했듯이 다이(dyE)는 ‘복숭아 Presents’에서 관여한 사운드트랙을 통해 예민한 영화팬들의 궁금증을 자아낸 바 있다. 이언희 감독의 영화 [...ing](2003)의 삽입곡 “Sunflower”를 통해 첫 선을 보인 뒤, 김경형 감독의 영화 [라이어](2004)의 삽입곡 “Morning Song”, 김인식 감독의 영화 [얼굴 없는 미녀](2004)의 삽입곡 “지수 Theme”, 그리고 지난 해 전주국제영화제를 비롯해 여러 영화제에서 상영되었으나 정식 개봉은 최근에 이뤄진 민병국 감독의 영화 [가능한 변화들]의 타이틀곡 “가능한 변화들”을 통해 부분적으로나마 인사를 했다.
그처럼 ‘복숭아 Presents’의 사운드트랙들에 단골로 보컬 피처링하면서 사실 다이(dyE)의 독집이 발매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던 셈이다. 비록이번 [폐곡선(Closed Trace)]은 정규 독집보다는 짧은 EP 음반이지만 말이다. 음반에 수록된 다섯 곡 모두 다이(dyE)가 작사와 노래를 했고, 강기영, 장영규, 방준석, 이병훈이 작곡에 고루 참여했다. 이들 ‘복숭아 Presents’ 소속 뮤지션의 참여방식은 앞서 살펴본 한영애의 [Behind Time]과 달리 해당 트랙의 작곡에 참여한 뮤지션이 그 트랙의 편곡과 사운드 전체를 책임지는 방식을 취했다. 한 뮤지션이 한 트랙의 사운드 전체를 맡을 수 있었던 것은 수록곡들이 일렉트로니카 음악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리얼 악기 연주는 찾아보기 어렵고 ‘키보드와 컴퓨터’로 빚어진 사운드가 지배적인 것은 그런 맥락에서다.
음반의 전체적인 톤은 어둡고 그로테스크하다. 음악 스타일은 ‘보컬이 있는 일렉트로니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표현이 ‘하나마나 한’ 것이라면, ‘뷰욕(Bjork)이 포티스헤드(Portishead)를 만난 것 같다’는 비유를 동원할 수는 있다. 비유는 비유에 그쳐야겠지만, 어쨌든 큰 틀에서는 일렉트로니카, 하위 장르로는 트립합(trip-hop), 다운템포(downtempo) 스타일로 수렴되는 음반이다. 여기 담긴 음악을 한 마디로 얘기하면 ‘감상용 전자음악’이다.
이 음반은 본격적으로 트립합과 다운템포 스타일을 엮은 매우 드문 일렉트로니카 음반이란 점에서, 그리고 가사와 곡과 사운드와 음반 커버가 일관된 얼개와 톤을 유지하면서 일정 수준 이상의 미학적 성취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2005년의 주목할만한 데뷔작으로 손꼽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이 말은 이 음반의 좌표가 일반적인 ‘가요음반’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성 가수의 데뷔작이란 점을 감안하면, 그 거리는 더욱 멀어진다. ‘복숭아 Presents’ 멤버들이 아예 그러기로 작정한 것은 아닐까 하는 심증이 굳어질 정도다.
[글 - 이용우 (대중음악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