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0년대 프랑스 대중 문화의 변혁을 주도했던 영원한 반항아 Michel Polnareff / Now (미쉘 뽈나레프 / 나우) 이제 환갑을 넘긴 원로 방송인 한 분을 공연장에서 만났을 때의 일이다. 공연장에 들어가기 전 커피를 마시며 이런 저런 덕담을 들려주시는 중에, 대뜸 이런 질문을 하신다.
“그...머시냐, 이름도 기억 안나네. 샹송도 아닌 것이, 커다란 ‘라이방’ 쓴 프랑스 가수 있지? 갸가 부른 곡 그거 정규 판이 우리나라에 들어왔나? 베스트 말고.”
이처럼 뜬금 없는 질문이 있나. 게다가 충격적인 단어 ‘라이방’이라니. 나이 드신 분답게 선글래스를’라이방(원래는 Ray-Ban이지만 일본식으로 부르는 발음이 굳어진 것)‘이라고 부르시다니. 하지만 글쓴이는 금새 그 주인공이 미쉘 뽈나레프이고, 그 원로 방송인께서 말씀하시던 곡이 바로’Qui a tué Grand' Maman(누가 우리 할머니를)‘이었으며, 정규 음반은 바로 1971년도 작품’Polnareff's'였다. 어쿠스틱 기타를 들고 마이크 앞에 서서 예의 트레이드 마크 ‘라이방’을 끼고 노래하는 사진. 그리고 주위는 황금색으로 도배된 표지. 그분의 말씀에 따르면, 젊은 날을 함께 보냈던 여러 아티스트들 가운데 미쉘 뽈나레프만큼 강렬한 아티스트가 없었으며, 그분의 청춘을 수놓았던 음반 중 하나가 바로 미쉘 뽈나레프의 베스트 음반 ‘Now'였다고 한다. 이제 CD로 다시 만나는 미쉘 뽈나레프의’Now'는 그만큼 한 시대를 풍미했던 상징적인 음반이었다. 그러나 미쉘 뽈나레프의 예술은 지구 반대편에서 살아가던 당시 대한민국의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프랑스 현지에서도 커다란 화제를 불러일으킨 장본인이었다. 미쉘 뽈나레프는 프랑스 대중음악 역사상 전통 또는 관습적인 형태와는 가장 거리가 먼 아티스트로 평가된다. 물론 이런 ‘대세에 대한 저항’은 그가 프랑스 식 싱어송 라이터라는 것에서 기인하며, 실제로 그가 발표한 작품 대부분은 어떤 작품을 봐도 샹송을 포함해 당대의 음악 형식과는 다른 차별성을 띠고 있었다. 프랑스 현지에서는 미쉘 뽈나레프를 가리켜 ‘날아오는 파도에 역행하여 대항했던 수영선수’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뽈나레프의 음악 인생은 평범하거나 ‘뻔한 것’을 거부하는 기인의 삶이었다.
미쉘 뽈나레프는 1944년 7월 3일 생이다. 프랑스 ‘가론(Garonne)'에서 태어난 그는 곧바로 부모가 파리로 이주하면서 미쉘 뽈나레프 역시 유년기를 도시에서 보내게 된다. 이때 그의 아버지 레이프(Leib Polnareff)가 레오 폴(Leo Poll)이라는 예명을 사용하면서 당대의 유명한 가수들과 함께 작업했던 음악인이었기 때문에, 미쉘 역시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당시 프랑스의 최신 음악 경향을 직접 보고 배울 수 있었다. 심지어 그의 어머니 시몬느(Simone)조차 거쉰(Gershwin)이나 콜 포터(Cole Porter)의 작품들을 연주하곤 했던 피아니스트였기 때문에, 유년기의 미쉘 뽈나레프는 자연스럽게 클래식과 팝, 그리고 재즈를 가정에서부터 접하고 익힐 수 있는 최상의 여건 속에서 자란 셈이다. 덕분에 그의 재능은 다섯 살때부터 드러나면서 겨우 만 열한 살이 조금 지났을 때 이미 파리 음악원(Paris Conservatoire)에서 주최하는 대회에서 우승할 정도로 탁월한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후 미쉘의 관심은 클래식 연주와 편곡으로 방향전환을 하면서, 당시부터 유명 클래식 작품들을 재즈 오케스트라용으로 편곡하는 등 미쉘은 다방면에 걸쳐 천재적 기질을 선보였다.
재미있는 것은, 20대에 들어선 미쉘 뽈나레프가 생계를 위해 시작했던 일이 ‘군악대’였다는 사실이다. 이후 군악대를 나온 미쉘이 선택했던 일은 보험회사 일과 은행 업무였는데, 음악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결국 모든 것을 때려치우고 기타 한 대만 손에 쥔 채 몽마르트르 언덕에 올라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끊임없이 방문하는 몽마르트르 언덕의 관광객들은 잠재적 관중들이 되어 미래의 수퍼스타에게 커다란 경험과 힘을 실어주는 역할을 한 셈이다. 이후 미쉘은 록 음악 전문 클럽에 들어가 연주를 하기 시작한다. 재미있는 것은 우승자에게 당시 프랑스 최고의 레이블이었던 바클리(Barclay)에서 음반을 레코딩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던 한 클럽 주최 경연대회가 있었다고 한다. 미쉘 폴나레프는 이 경연대회에서 우승했지만, 정작 미쉘 뽈나레프는 ‘아직 때가 아니며 벌써부터 음반 작업은 나에게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상을 거부한 일화가 있다.
이후 미쉘 뽈나레프는 연주 활동을 이어가다가 여러 음반사들과 접촉하기 시작하는데, 첫 히트 싱글로 기록되는 ‘La poupée qui fait non(아무 것도 하지 않는 인형)’을 AZ 레이블과 계약한 후 발표한다(재미있는 것은 AZ 레이블이나 바클리 모두 현재 유니버설 프랑스 산하 레이블로 존재한다). 이후 성공 가도를 달리기 시작하는 미쉘 뽈나레프는 야드버즈(Yardbirds)와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을 거친 기타리스트로 지미 페이지(Jimmy Page)와 함께 작업하기도 했다.
미쉘 뽈나레프의 성공은 1966년, ‘Love Me Please Love Me'의 히트 이후 단지 음악적인 성공뿐만 아니라 60년대 프랑스 젊은이들의 사상을 지배했던’Yeye(예예)‘ 족의 상징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예예‘는 60년대 당시 프랑스에서는 미국 문화를 따라가려는 프랑스 젊은이들이 ‘예예(Yeah-Yeah)'를 외친다고 해서 붙여진 움직임인데, 실제로 미쉘 뽈나레프의 음악은 프랑스 록큰롤 가운데 비교적 부드럽고 유순하며 전형적인’예예‘ 스타일로 인정받았다. 이후 같은 해’L'oiseau de nuit(밤의 새)‘를 비롯해 많은 히트곡들을 선보이면서 미쉘 뽈나레프는 60년대 프랑스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았다. 이 당시 그는 올랭피아 극장 무대에만도 여러 번 오르는 등 레코딩뿐만 아니라 활발한 공연 활동도 병행하고 있었다.
1970년대 들어와 미쉘 뽈나레프의 관심을 맨 처음 끌었던 음악은 다름아닌 ‘블루스(Blues)'였다. 전형적인 미국식 음악이었지만 미쉘 뽈나레프는 록큰롤과 마찬가지로 블루스를 고스란히 받아들이지 않고 프랑스식으로 새롭게 선보였는데, 그 결과물 중 하나가 바로 1972년에 공개해 역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던’Holidays(휴일)‘이었다. 이후 미쉘 뽈나레프는 보다 다양한 음악들을 설렵하면서 변화를 모색하는데, 미국 문화에 대해’항상‘ 부정적이었던 프랑스 언론은 미국 대중음악을 접목시키는 미쉘에 대해 꾸준히 비판적인 논조를 견지하고 있었다. 덕분에 미쉘 뽈나레프는 60년대에 이어 70년대에도 그를 비판하는 미디어와의 전쟁을 2라운드로 끌고 갔으며, 그의 음악들은 더욱 다양한 형태로 진화해갔다. 이때부터 미쉘 뽈나레프의 명성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일본과 미국에도 퍼지기 시작해, 1972년에 첫 일본 투어를, 이듬해인 1973년부터 본격적인 미국 순회공연을 시작했다. 물론 이 투어들은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이후 미쉘은 세계 곳곳을 다니는 국제적인 수퍼스타가 되었다. 이 당시에 발표한 곡들이’Qui a tué Grand Maman‘을 비롯해 우리나라에도 소개된 명곡들이 대부분 포진해 있다.
베스트 선곡집 ‘Now'
LP 시대에 국내에 처음 공개되었을 때에는 ‘Gold Disc'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이 음반은, 프랑스 현지에서’Now'라는 타이틀로 처음 소개되었다. 이후 90년대 초반에 국내에 재발매되면서 ‘Now'라는 이름을 되찾았는데, 전성기 시절이라 할 수 있는 70년대 미쉘 뽈나레프의 히트곡들을 모아놓은 베스트 오브 베스트이다. 이름을 국내에 각인시킨 히트곡’Qui a tué Grand' Maman'을 첫머리에 수록하면서, 'Holidays', 'Gloria(글로리아)‘,’Comme Juliette et Romeo(줄리엣과 로미오처럼)‘, 80년대 초반 국내에서 라디오 시그널 뮤직으로 사용되는 등 연주곡 버전으로 더욱 친숙한 ’Ca n'arrive qu‘aux autres(타인에게 도착하지 않은)’의 두 가지 버전, ‘tous les bateaux, tous les oiseaux(모든 배들, 모든 새들)’ 등 어느 한 곡 버릴 것 없는 열 세 곡이 수록되어 있다. 이 음반에 수록되어 있는 히트곡들은 미쉘 뽈나레프의 성공을 보장했던 작품들이자, 60년대 중반을 넘어 70년대 프랑스 대중 문화를 상징하는 곡들이다. 한 예로, ‘Qui a tué Grand' Maman'이 수록된 1971년도 음반’Polnareff's'는 20세기 프랑스 대중음악 명반 100선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작품이기도 하다. 이처럼 미셀 뽈나레프의 음악은 당대의 프랑스 젊은이들을 대변했으며, 그 결과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음반 ‘Now'이다.
80년대 이후 미쉘 뽈나레프는 미국으로 이주했다. 또한 정규 레코딩 활동 이외에도 영화음악에 많은 관심을 가지면서 여러 작품들을 발표했고, 프랑스와 미국을 오가며 지금도 현역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영원히 늙지 않을 것 같던 그도 이제 우리나라 나이로 환갑을 훨씬 넘긴 나이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가 추구했던 시대 정신에 대한 반항과 평범함을 거부했던 그의 예술은 세월이 흘러도 결코 퇴색되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 숨쉬고 있다. ‘Qui a tué Grand' Maman'으로 대표되는 그이 예술이 우리 민중가요 ‘5월의 노래’로든, 우리 가요 가수 오태호의 ‘기억 속의 멜로디’로든. 올드 팬들에게는 ‘라이방’으로 불리는 특유의 선글래스와 함께.